나의 미국수난기 17 - 마음고생 편
우리 아이들은 밥을 잘 먹는다.
먹성이 좋은 편이다.
가리는 음식도 별로 없거니와
먹는 양도 적지 않다.
나는 학교 때 마비혀, 로 불렸다
무슨 음식을 주어도 음. 맛있네?라고 하는.
혀가 마비되어 독을 먹여도 음. 맛있네? 할 거라는 추리.
마비된 혀를 가진 엄마의 먹성 좋은 아이들.
뭐. 그런데 이게 한국에서는 미덕이다.
잘 먹고, 많이 먹고, 더 먹고. 싹 비우기.
적당한 체중. 지방과 근육의 조화로운 균형.
한국에서 청소년기 이하의 여자아이들에게 이런 무난한 먹성과 신체밸런스는
어른들에게 찬양의 대상이 된다.
어머. 순이는 어쩜 저렇게 밥을 잘 먹나요
아이쿠, 우리 영이는 밥도 잘 먹네. 쑥쑥 크거라. 옹냐옹냐.
할머니고 이웃 엄마들이고 모두 기특하다며 칭찬했다.
나는 마비혀를 가진 요리 못하는 엄마였지만
그런 미덕(?)이 아이들이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을 수 있게 밑거름이 되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미국에 오고 보니
잘 먹는 것은 불편한 일이 되었다.
미국의 아이들은 생일파티에서도 음식에 관심이 별로 없다.
식어 빠진 피자를 먹고, 시판 애플 주스를 마시고,
동네 슈퍼마켓에 파는 색색깔 아이싱이 가득 올려진 그냥 그런 컵케익을 먹는다.
그렇게 먹어도 불만이 없고, 그마저도 남긴다.
아이들은 대체로 마른 체형이다.
어깨에서 팔목으로 내려오는 부분을 보고 있자면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헨젤이 내민 닭뼈가 상상된다.
초등학교에서 런치타임도 20여 분 안에 마무리된다.
대부분 대화를 나누는데 시간을 할애하고 먹는 것은 그저 덤이다.
미국의 대학도 크게 다르지 않다.
치즈와 햄이 끼워진 샌드위치. 혹은 포테이토칩 한 봉지로 끼니를 때운다.
저녁에 많이 먹는지 들여다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이들은 아마 먹는 행위에 소울이 없는 듯하다.
한 번은 미국에서 2년 정도 먼저 살아본(?) 친구네 가족과 여행을 가서였다.
여행경비를 반반 부담하기로 하고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떠났다.
그 집도 엄마 1, 여자아이 2
우리 집도 엄마 1, 여자아이 2
비슷한 또래의 여자 여섯이 떠난 첫 여행.
신나고 즐거웠다. 플로리다의 바람은 겨울에도 온화했고 난생처음 가본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꿈과 환상의 나라, 그 자체였다.
여행지에서 아침은 컵밥과 과일로 때우고 점심 혹은 저녁은 주로 식당에서 먹었다.
친구와 그 아이들은 주로 쿠키나 빵, 과자로 또 다른 한 끼를 때웠다.
그런데 어쩌나.
밥다운 밥을 2끼 이상 먹어야 하는 우리 아이들은 늘 배가 고팠다.
식당에서 6명이 식사를 한번 하고 나면 140불은 족히 나왔다.
문제는 팁.이라는 것이었는데
그 팁이라는 놈이 참 보통 아니었다.
보통 기본값으로 제시되는 팁은 식사비용 + 세금의 20% 였다.
그럼 우리가 140불어치 밥을 먹고 10%의 세금(불행히도 세금은 연방 세와 주세를 합쳐 통상 10%를 넘는다)을 합쳐 154불을 청구받으면, 거기에 팁 30불을 더해서 184불을 지불하게 된다.
밥은 140불어치를 먹었지만 나는 184불은 내야 하는 상황.
언페어, 언리저너블. 인새인!!!! 오 크레이지!!!
라고 외치고 싶지만. 나는 품격 있는 사우스 코리안이므로, 소심하게 팁을 12~13% 정도로 지불한다.
그렇게 해서 170불을 지불한다.
물론 나의 서버는 내 앞에 팁을 쓰는 영수증을 따로 두고 다른 테이블로 떠난다.
서버가 내가 팁을 안 주는지, 5%를 주는지. 통 크게 20%를 주는지 지켜보고 있지는 않기에 그나마 나는 14달러를 아낄 수 있다.
여행의 마지막날이 되었다.
밤늦은 시간까지 놀이동산에서 신나게 놀이기구를 타고 우리는 몹시 허기졌다.
우리 아이들보다 족히 5킬로씩은 덜 나갈 거 같은 친구네 아이들도 그날은 배가 고픈 듯했다.
나는 호기롭게 내질렀다.
- 오늘은 마지막 밤이니 내가 살게!
여기서 저녁을 먹으면 정말 기억에 남을 거 같아! -
실제로 유니버설 스튜디오 정문을 나서면 나오는 큰길은 각종 레스토랑들로 번쩍였다.
정말 번쩍번쩍 화려하고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여기서 4일을 보내고 저녁 한 번을 못 먹고 가면 후회할 거 같았다.
우리는 미국의 유명 관광지마다 있는 해산물 음식점에 들어갔다.
매끼 햄버거, 샌드위치, 콘도그, 감자튀김과 치킨너겟 같은 것들로 끼니를 때운 우리 아이들은
그날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던 거 같다.
호기롭게 립아이를 주문했다. 새우가 들어간 요리와 잠발라야(카리브에서 유래된 밥요리)도 주문했다.
나는 내가 사겠다고 했으니 더 편안하게 아이들의 요구를 받았다.
친구는 그래도 함께 내야지. 비쌀 건데... 중얼거리며 역시나 치킨너겟과 감자튀김 같은 메뉴를 시켰다.
미안해서였을까.
예상대로 우리 집 아이들은 싹싹 접시를 비우고 추가 메뉴를 원했다.
그리고 깃털처럼 가벼운 친구네 아이들은 감튀와 너겟, 립아이를 두세 개 먹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동안 주렸던 아이들의 배를 가득 채워주리라. 다짐이라도 한 듯 나는 추가로 키즈 립아이를 또 주문했다.
친구의 눈빛이 흔들렸다.
살짝 신경이 쓰였지만 내가 살 건데 머.
아이들은 역시 뼈에 붙은 0.1 밀리그램의 살코기까지 먹어치웠다.
친구의 표정이 어두웠다.
반반 부담해야 하는 책임감 때문인가.
어떤 순간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 저건 뭐 하러 더 시켜서. -
뭐 하러 더 시켜서. 뭐 하러 더 시켜서. 뭐 하러 더 시켜서....
귓가에 메아리처럼 울리는 명대사.
뭐 하러 더 시켜서...
혼잣말이었지만 어쩌다 귀 밝은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내 아이들이 많이 먹어서.
어떤 의미로 내뱉은 말인지 모르는 체 나는 내 아이들의 먹성이 더 이상 미덕이 아님을.
아이들의 밥사랑, 고기사랑이 누군가에게는 좀 짜증 나는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황급히 주문서를 받고 결제를 진행했다.
내가 산다고 했으니 내가 사면되지 머.
설마 돈 때문에 저러는 건 아니겠지.
시원한 생맥주도 한잔 들어갔겠다, 나는 호기롭게 tip___________ 란에 약 12-3%가량의 팁을 적어
우리의 식사를 200불에 맞추었다.
맥주 탓인지, 수치심인지, 원인은 모르지만 붉어진 얼굴로 나는 호텔로 돌아가는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버스에서 확인한 영수증에는 놀라운 기록이 남아있었다.
엇어-
이 식당은 그래 튜이션 피, 우리가 말하는 팁을 20%나 이미 붙여서 청구서를 발행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청구된 음식값+세금+20%의 팁까지 합쳐진 총액에 다시 12~3%의 추가팁을 덧붙여준 것이었다.
흐드드....
그럼 팁만 우리 돈으로 48,000원을 지불한 셈.
허허.
황급히 식당으로 전화를 걸어, 내가 실수로 엑스트라 팁을 지불했다며 설명하고 환불을 요청했다.
화가 났다.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150불어치 밥을 먹고 50불은 세금과 팁으로 내는 건 대체 무슨 법인가.
그 가게 직원들의 노고는 고용주가 대우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마치 직원들의 월급도 내가 주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미국 식당 서버의 봉급상황은 매우 열악하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내는 그레튜이션 피, 로 그들은 부족한 시급을 매운다고.
그런 기사를 보고 나면 NO TIP 버튼을 누르기가 어렵다.
그날 이후로 나는 친구네 가족과 여행은 가되 식사는 웬만하면 따로 한다.
좀 웃기는 상황이지만
호텔을 따로 잡는다.
그리고 내가 저녁을 쏘는 날에만 함께 식사를 한다.
많이 먹는 아이를 자식으로 케어하는 나는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그 집 아이들이 먹는 양을 모른 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안하고, 조금 민망해서
쓰면서도 자꾸 웃음이 난다.
많이 먹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잘 먹는 편, 또 시키는구나.
잘 먹는 내 아이들은 오늘도 맛없는 내 요리에 엄치를 척. 해준다.
모르겠다.
내가 낸 팁도 그 서버의 집 식탁 위 아이들의 저녁요리에 소스로 뿌려졌겠지.
그날 이후로 나는 항상 두 눈을 부릅뜨고 청구서를 체크한다.
기본 20% 팁이 이미 포함된 영수증이라는 걸 확인하면,
과감하게 쓰고 소심하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 NO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