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화상(畵像)일기
무거운 짐처럼,
숨기고 싶은 약점마냥,
해결하지 못한 숙제 같은,
영어회화는 나에게 그런 존재다.
인생에서 제법 많은 시간을 영어공부에 할애했지만
정작 나는 미국인들 앞에서 세상 과묵한 캐릭터가 된다.
우선은 못 알아들으니까.
뭐라고요? 한 번만 더 말해주실래요? 를 두 번 이상 말하면
자연스럽게 대화는 줄어든다.
< 한 번만 더 천천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가 아직 네이티브 잉글리시를 다 이해하지 못해서요
저는 당신과의 대화가 정말 즐겁답니다. 하지만 저의 리스닝이 부족해서 미안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사정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아마도 달라질 거다.
내 앞에서 빠른 속도로 말하던 그녀, 혹은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술도 동그랗게 오므릴 테지.
그리고 오우, 괜찮아요. 당신의 영어는 정말 훌륭해요.
그리고 조금 더 천천해 말해줄 거다.
그러면 나는 친절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가끔 떠듬떠듬 내 이야기도 할 테지. 우리는 좋은 대화를 마무리하고 좋은 친구가 될 거야.
그래. 나의 상상 속에서 -
영어는 다른 존재다.
나의 용기와 노력을 한순간에 휴지 조각으로 만드는 힘을 가진. 냉정한 녀석.
나는 결코 상대방의 빠른 영어를 중간에 끊고 천천히 말해주시겠어요?라고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양해를 구하는 그 세 문장을 멋지게(?) 유창하게(?) 블라블라 할 자신이 없으므로.
상대의 말을 끊거나 상대가 한 말을 못 알아 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날 거 같아서.
그래서 나는 조용히 웃으며 듣는다.
제발 나에게 되묻지 말기를, 내가 무슨 말했는지 너 알아듣니?라고 물어보지 않기를 빌면서.
여기까지가 내 미국생활 전반기의 내 모습이다.
나는 위축되었다.
부끄러웠고, 늘 말을 더듬었다.
과거와 현재, DO와 DOES, 평서문과 의문문, 의문사와 일반동사, 현재완료와 과거, 단수와 복수,
F와 P, R과 L,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나는 좀 모지란 사람처럼 허둥댔고, 내 얼굴과 몸은 작고 소심해졌다.
그래서 시작했다.
화상영어를.
미국에 와서 화상영어를 하는 나.
어두운 거실에 앉아 컴퓨터를 켜는 나.
아이들이 나의 구린 영어를 들을까 봐 늘 아이들이 없는 순간에만 로그인을 하는 나.
그리고 전 세계 곳곳에서 살고 있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을 만난다.
일리노이, 보스턴, 플로리다, 영국의 웨일스, 아프리카의 감비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캐나다 밴쿠버, 동유럽의 조지아...
생활하는 시간대도 다르고, 얼굴과 성격, 살아온 궤적과 직업도 모두 다른 사람들을 만나
4천 시간이 넘게 대화를 했다.
그들은 여행자였고, 전직 교사였고, 헬스트레이너였고, 주부였으며, NGO소속의 발런티어였다.
누군가는 어머니를 여의고, 누군가는 어려서 오빠의 죽음을 경험했고, 누군가는 20살 차이 나는 남친과 살고 있었다.
나는 제한된 단어와 맞지 않은 문법을 구사했지만
그들은 내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열심히 교정해 주었다.
자판을 두들겨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상대에게 물어보는 횟수가 줄어들고,
말로 이러이러한 상황을 어찌 설명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횟수는 늘었다.
사실 나의 영어실력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학교 때처럼 단어를 열심히 외우지도, 문법공부를 새롭게 시작하지도 않았기에
달라진 것은 그들이 말하는 컨피던스, 그것 하나다.
언어는 소통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
일리노이에 사는 언니.
55세의 그녀는 강아지 두 마리, 두 자녀,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그녀는 지난 10개월간 나의 부족한 영어를 모두 참아주고 교정해 주고 또 나의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해 주었다.
나는 그녀가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 눈물을 닦으며 서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심각한 대화를 하면서도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다시 공부 모드로 돌아오기도 하고
건강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대장내시경, 갑상선, 심장병, 뇌졸중 등등 단어의 발음을 몰라 서너 번씩 교정을 받기도 한다.
그 모든 과정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기죽은 나를.
이 나이 먹도록 제대로 영어 한마디 못하고 살아온 나에 대한 부끄러움을.
낯선 나라에서 애 둘을 키우며 갖은 실수를 저지르는 한심한 나를
감정조절도 잘 못하는 어리석은 엄마인 여자를
멀리에 있는 그들이 일으켜 세운다.
감비아에서 바르셀로나에서 웨일스에서
각자의 아픔을 영어라는 도구로 조금씩 보여주고 쓰다듬는다.
나는 매일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컴퓨터를 켠다.
오늘 그녀는 어떤 립스틱을 발랐나
그녀의 어제는 어땠나
나의 어떤 일상을 이야기해 줄까.
내가 영어를 하는 이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더 즐거운 대화를 하기 위해서.
남들에게는 부끄러워 말 못 하는 나만의 비밀.
나의 화상일지.
나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나의 화상일지.
오늘도 나는 미국땅에서 화상영어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