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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쇄도전러 수찌 Jul 26. 2023

당신은 손 편지를 주고받나요?

자구리 해안에 가면 편지를 쓰자

손 편지를 마지막으로 받았던 때가 언제던가? 기억도 가물가물하려 한다. 1초 만에 카톡이 오가는 시대에, 편지는 완전히 '낭만'의 영역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최근에 두 통의 엽서를 받았다. 심지어 편지도 아닌 '엽서'다.


첫 번째 엽서는 내가 내게 쓴 엽서였다.

어느 날 지친 퇴근길에 집 무심코 우체통을 들여다봤다.

'관리비 고지서나 들고 가야지... ㅎ'


생각하며 우체통을 바라봤더니, 고지서 말고도 한 장짜리 무언가가 더 꽂혀있었다.

'아 진짜. 농협 카드론인지 사장님 대출인지 또 넣어둔 거냐...'

무심코 버리려던 찰나.

"헉"

소리가 육성으로 나왔다. 완벽하게 잊고 살던 엽서였다. 22년 1월에 제주도 자구리 해안에서 내가 내게 쓴.

맞아, 1년 뒤 보내주는 느린 우체통이랬다.


내가 이 엽서를 써넣은 건 작년 1월이고, 올해 5월 말 날짜로 서귀포 중앙동 우체국 직인이 찍혀있었다. 그리하여 이 엽서가 내 손으로 돌아온 건 직인이 찍힌 날로부터 또 2달이 지난 7월 중순 경이었다. 무려 1년 반 동안 세상을 떠돌았지만 엽서는 모서리 하나 헤진 데 없이 빳빳하니 온전했다.


조금 힘든 날이었나 보다. 내 손으로 쓴 편지인데도 읽는 데 눈물이 살살 솟을 뻔했다.

이 편지는 29세에서 30세로 넘어가던 해, 여러모로 무척이나 깝깝했던 심정으로 제주에 내려가서 쓴 것이었다. 서귀포 자구리 해안공원에 느린 우체통이 있단 사실을 나 같은 사람이 알고 갔을 리는 없었고, 그냥 하영 올레길을 무작정 따라 걷다가 마주쳤던 걸로 기억한다.



엽서 서두에도 기어이 남겨둔 대로, 해가 쨍쨍하다가 10m만 걸어가니 비가 내리다가 또 우산이 날아갈 만큼 바람이 많이 불어대는 날이었다. 깜깜한 심정만큼이나 날씨도 기묘했던 날이었다.


이러한 '공공주도 이벤트(?)'는 원활히 운영되지 않기도 한다.

- 엽서가 다 떨어졌다든지,

- 펜이 없다든지,

- 이 사업을 실제로 접은 지가 오래되었지만 철거하지 않아 우체통만 덩그러니 있다든지.

놀랍게도 그날은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엽서 종이도 넉넉했고, 펜 하나 없던 나를 위해 잘 나오는 펜도 한 자루 놓여있었다.


실제로 이 느린 우체통이 운영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당시 마음이 답답해 제주로 향했던 나는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내게 편지를 썼다. 벤치에 앉아 눌러 아주 오래간만에 편지를 썼다.

당시 1년 뒤 내게 쏜 말은 '제발 그렇게 살고싶다고 내게 소리치고 싶던' 내용에 가까웠다.


- 비록 최고의 선택이 아닐지라도 그 선택을 통해 또 배우는 게 있을 거야.

- 정답만 찾지 말고, 최선으로 선택하고 그 선택을 담담히 받아들이기.

- 그 선택에 따라 또 다음을 열심히 꾸려나가기.


당시의 간절했던 소망이 사뭇 도도한 척하며 녹아있어 우습다.


종이 위에 꾹꾹 눌러써서 이뤄진 걸까.

ps. 책은 냈니?라는 물음에 '그래!'라고 대답할 수 있어 다행이다. 당시 나는 두 번째 책이었던 '그렇다고 회사를 때려치울 수 없잖아요' 투고를 앞두고도 이래저래 불안했다.


나를 위해 진지하게 눌러쓴 편지가 온전히 내게로 날아와줘서, 마침 또 조금 힘들던 날에 내 우체통에 꽂혀있어줘서. 기가 막히게 고맙다.


역시 세상은 그래도 좋게 좋게 돌아가는 모양이다.



이 편지를 받고 이틀 뒤에 또 우연히 엽서를 받았다.


그날은 내가 그동안 신경 써 준비한 '떠나게 만드는 여행학교 1기' 강의 날이었다. 나와 펜팔 친구(?)처럼 블로그로만 몇 번 소통했던 분이 강의를 신청 해주셨다. 실제로 뵌 적은 물론 없었지만, 강의장에서 대번에 그분이 내 펜팔 친구 00님임을 알 수 있었다.


입에 발린 말이지만, 와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응원의 선물까지 건네주시다니. 부모 자식 간에도, 추구하는 바를 100% 설명하기 어려워 그저 각자 건강하기를 바라는 시대에. '많이 설명하지 않아도 나와 비슷한 인간임'이 팍팍 느껴지는 그의 편지는 곁눈질로만 얼른 읽어도 힘이 됐다.

역시 손 편지의 힘은 위대하다. 아니 손 편지라서 위대하다고 해야 할까. 디지털 시대에 굳이 종이에 꾹꾹 눌러 박제하는 일은, 그만큼 간절한 소망이기 때문일까.


손바닥만 한 위안이 끊임없이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것 같다. 자구리 해안에 가면 편지를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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