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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쇄도전러 수찌 Sep 24. 2023

당신은 라떼를 좋아하나요?

라떼와 나때를 좋아하는 여자

술은 가끔 마시고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술은 이른 나이에 방구석 알코올 중독자가 될 뻔한 위기를 겪고 가까스로 끊어 내었다. (물론 기쁘고 슬픈 날 한 잔을 짠-걸치는 기회까지 내려놓지는 않았다. 더 늦기 전에 중독되었음을 깨닫고 끊어 냈음에 감사한다.) 잔잔한 노력이 주는 성취보다 짧은 도파민에 더 쉽게 중독되는 내 성향을 알기에, 담배는 처음부터 입에 대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커피조차 끊지 못하는데, 만약 담배를 시작했다면 틀림없이 오늘도 담배를 물고 있었을 것 같다.      


이 험한 세상을 가까스로 향정신성 물질 없이 맨정신으로 버티어나가는 내게, 스스로 허가한 유일한 붐-업 물질은 바로 카페인이다.      


맹렬하던 여름이 소리 없이 저물고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쌀쌀해져 오는 초가을엔, 기가 막히게 따듯한 라떼가 그립다. 익숙지 않은 찬 기운에 그저 이불을 둘둘 말고 침대와 한 몸이 되고 싶은 아침.      

‘일찍 가면 라떼 한 잔 사 줄게’ 

속삭이며 스스로를 꾀인다. 내 카드에서 돈이 나가서 나를 먹이는 일이니 ‘사준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지만. 그래도 달리 나를 도닥여 줄 가족이 없는 1인 가구는 이런 아침이라면 앞뒤가 맞지 않는 표현으로나마 스스로를 꼬셔야 한다. 그리하여 가까스로 머리를 감고 옷을 걸친 뒤 평소보다 조금 더 상기된 발걸음으로 회사 앞 카페에 당도한다. 따듯한 라떼를 들이키며 몸속 한 줄기가 따끈해지는 걸 느낀다. 커피가 기온보다 따듯해서일지, 그 속에 섞인 카페인 파워 덕분인지. 어제보다 약간 더 추워진 오늘도 그럭저럭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안정된 기분이 된다. 


이렇게 라떼는 내게 ‘안정과 평화’의 다른 표현이다. 겨울에는 따듯한 라떼로 심신 안정을, 여름에는 시원한 라떼로 도심 속 이너피스를 찾는다.      


이 부분은 틀림없이 엄마를 닮았다. 커피에 대한 나의 기억은 ‘엄마의 맥심’으로 시작된다. 엄마는 매일 커피 믹스를 두어 잔 마셨다. 아침에는 새 하루가 시작되었으니 당연히 한 잔, 오후에는 하루가 잘 흘러가고 있으니 또 한 잔을 마셨다. 생활의 곳곳에서 부침이 느껴질 때는 엄마의 하루에 n잔의 커피가 추가되었다. 아빠와 다퉜을 때, 우리 남매가 싸워 속상할 때. 엄마는 별수 없이 맥심의 봉지를 찢었다. 작고 노란 그 봉지는 그 시절 엄마에게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가장 재빠른 수단이었다. 오늘날 따듯하고 차가운 라떼가 내게 그렇듯.      

커피 믹스는 가능한 지양하려 하지만, 회사에서 지칠 땐 또 그만한 자양강장제가 없다. 회사 밖으로 뛰쳐나갈 여유가 없을 땐 노란 커피 두 봉을 뜯어 뜨거운 물에 녹이고 얼음을 탄다. 믹스 두 봉으로 만든 K-회사원 카페라테야말로 21세기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시대의 기둥’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급조된 K-회사원 라떼로 ‘반짝’ 에너지를 당기면, 또 그럭저럭 남은 하루를 버틸 기운이 생긴다. 엄마가 그랬듯.     


이미 한물간 표현인 것 같기도 하지만, ‘나 때는 말이야~’의 ‘나 때’도 개인적으로 그리 밉지만은 않다. ‘추억으로 산다’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으로서, 그네들의 ‘나 때’를 들어보는 일은 종종 흥미롭다. 세상 무섭게 생긴 부장이 대학교 때 밴드부 보컬이었다는 이야기는 소름 돋게 놀라웠고, 회사에 말도 없이 동네 전국 노래자랑 예선에 나갔다는 소식은 더 충격적이었다. 물론 ‘나 때는 말이야~’가 듣기 좋은 건 그 추억을 풀기 시작하는 저 아저씨가 밉지 않기 때문이다. (듣기 싫은 ‘나 때’를 시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타산지석 삼아 잠시 듣고 넘기면 그만이다)      


무심결에 ‘나 때’를 외치며 아저씨들은 종종 20년 전으로 돌아간다. 급격히 초롱초롱해진 그들의 눈빛과 함께 짧은 과거 여행을 떠나, 그 시절에 내려 그들과 마주한다. 유난히 생생한 지난 추억 조각 몇 개를 끝없이 곱씹으며 내가 오늘을 버티듯. 그들도 이 추억으로 오늘을 버티고 있겠구나. 이 세계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도 추억 여행의 목적지에서는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너무 잦지 않은) ‘나 때는 말이야~’를 싫어하지만은 않는 이유다.      


이렇게 오늘도 라떼와 나때의 힘으로 버틴다. 이 두 축은 회사에 잠긴 3n살의 도시인을 달래는 채찍이요 당근이다. 라떼로 장작을 넣어 준 오늘이 먼 훗날에는 기분 좋은 ‘나 때’가 되어야 할 텐데. 쉽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그러길 바란다.      


당신은 ‘라떼’를, ‘나 때’를 좋아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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