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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Park Nov 15. 2020

푸른 화분에 둘러싸인 섬

누구나 마음에 품고 있는 나만의 도시가 있다.

불면증으로 쉬이 잠들지 못해 뒤척이던 어느 밤, 잠 기운을 옭아매고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났다. 동이 트기 직전의 푸른 새벽빛을 조명삼아 김영하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어 내려갔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러보았지만 그 어떤 이미지도 내가 본 것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디지털카메라의 2.5인치 액정에 담긴 해협과 절벽, 불카노의 풍경은 빛바랜 관광엽서처럼 식상하고 진부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쿠터를 타고 달려와 맞이한 풍경은 그렇지 않았다.”


“어떤 풍경은 그대로 한 인간의 가슴으로 들어와 맹장이나 발가락처럼 몸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볍게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소모임의 여름방학 프로젝트였던 ‘여행 사진집’을 위해, 어떤 대상을 사진으로 담아내야 할지 고민하던 때가 떠올랐다. 대개 어떤 나라를 떠올리면 곧바로 연상되는 풍경이나 사물이 있다. 파리의 에펠탑, 브라질의 삼바 축제, 일본의 벚꽃. 흔히 알려진 대만의 이미지 역시 언젠가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붉은 홍등이 바람에 넘실대는 거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관광 상품이나 다름없는 사물 대신, 정말 소박하고 눈에 잘 띄지 않더라도 내가 느끼는 그 도시의 모습을 닮은 대상을 찍고 싶었다.


막 입시를 끝낸 고등학교 3학년 가을 무렵, 가족여행으로 다녀왔던 타이베이를 잊지 못해 반년만에 그곳을 다시 찾았다.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대만의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Jimmy’의 거대한 달 조형물이 설치되는 것을 보아야 한다고, 또 그 해 여름에 열릴 반딧불 축제를 보러 가야 한다고 우겨서 떠난 여행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두 장소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몰랐다. 그저 고달픈 서울살이에 포근한 그때의 기억을 좇아 무작정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어지는 <푸른 화분에 둘러싸인 섬>은 ‘여행 사진집’에 싣기 위해 쓴 글이다. 문장 문장을 이어가면서 내가 대만을, 그 여름날을 떠올리면 왜 가슴이 그토록 벅찬 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네모 반듯하고 차가워지는 세상 속에서 아직까지 따뜻함을 간직한 그곳에서의 기억을 말이다.




푸른 화분에 둘러싸인 섬, 2017


내가 처음 대만에 가겠다는 마음을 먹은 건 순전히 그 친구의 눈에 담겼을 그곳의 모습과, 그 곳에서 느꼈을 감정을 나도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강가의 버드나무가 긴 가닥가닥을 바람에 띄우는 항주, 하늘과 가까운 연못에 보석을 녹인 듯한 신비로움이 흐르는 구채구. 중국에 살면서 아름다운 도시들을 꽤 다녀보았던 나였다. 이젠 더 이상 여행의 기억을 함께 더듬어갈 너는 곁에 없지만, 나는 내 마음속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그 섬에 머물러 있다.


화분. 홍등으로 가득한 야시장 거리와 간절한 마음을 불꽃에 빌려 하늘 저 어딘가로 올려 보내는 풍등, 진주알을 넣어 만든 뽀오얀 밀크티, 금방이라도 하늘 위로 솟구쳐 올라갈 듯 절 지붕 곳곳에 내려앉은 화려한 용으로 가득한 대만이었다. 하지만 두 번의 여행 끝에 대만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화분이었다.


 때마다 비가 왔다. 공기에는 항상 물기가 가득했고 사람들을 비가 와도 햇살인  지나다녔다. 빗방울에 자주 젖는 풀은 습기와  바람으로 인해 빛이 바랜 콘크리트 건물과 대비되어 더욱 푸르게 빛났다. 대만 어디를 가도 항상   있었던 것은 이런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싱그럽게 자라나는 화분이었다. 초록빛 자연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이곳 사람들은 공간이 허락하는  걸음걸음 닿는 모든 곳을 화분으로 가득 채우고자 했다. 집은 물론 가게마다,  골목마다 줄지어 세워놓은 화분들의 모습이 어수선하면서도  꾸밈없는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렇게 대만은 회갈빛 번화가든지 파아란 바닷가 마을이든지 식물과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었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창밖이 보이긴 할까?

대만 사람들이 집에서 화분을 키우는 대표적인 방법은 베란다나 창가에 화분을 줄지어 늘어놓는 것이었다. 이런 화분이 가끔은 창문을 훌쩍 넘어 무성하게 자라나 시야를 모두 가려버리는 웃지 못할 상황도 생겼지만 그 사람들은 집 가장 가까이에서 초록을 느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듯했다. 가장 일반적인 화분 색은 적갈색이었지만 알록달록 무지개 빛깔의 화분을 구해다 놓은 집들 덕분에 대만의 거리는 인형의 집같이 아기자기해졌다. 창문에 차례차례 줄 지어놓기도 했지만 창문 끝에서 밧줄처럼 늘어뜨려 흡사 빗줄기 아래에 있는 기분이 들게 하는 식물도 있었고 가끔 남다른 발육으로 식물원에서나 키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화분들의 공통점은 모두 ‘풀’이었다는 것이다. 유럽을 가보진 않았지만 사진으로, 또 책으로 마주했던 그곳은 꽃이 각각의 조형물처럼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대만의 거리를 채우고 있던 것은 연두색 잎사귀가 오밀조밀 달린 초목이었다. 대만의 화분은 이곳 사람들을 참 많이 닮았다. 순박하고 정이 많아 낯선 외국인의 질문에도 누구보다 환한 웃음으로 답하고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가던 걸음도 돌리는 사람들. 그 어느 누구도 서두르려 일상을 깨지 않아 항상 평화롭다. 나무를 깎고 자기를 빚어 잔잔한 소리를 내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공방에 가득 채우는 사람들. 사랑스러움이 비를 머금고 피어나는 푸른 잎새들과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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