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병은 개나줘버려

가난은 아프다 1편

가난의 악순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릴적 사진과 함께 잠깐 잠깐씩 기억나는 어릴때 기억들을 더듬어보면 우리가족은 정말 지지리도 가난했다.

항상 내 어릴적 사진의 배경은 단칸방이거나 뒤에 산이나 언덕이 있는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다.

지금 미개발지로 유명한 중계동 백사번지(중계 본동 백사마을)의 산 중턱에서도 살았던 기억이 난다.

40900_31387_5931.jpg <현재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우는 백사마을 이 곳에서 난 6, 7, 8살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는 악착같았다.

새벽 4시에일어나 우유배달을 가셨고, 아침에 들어와 밀린 잠을 주무셨다.

내 기억 속에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 일을 나가셨고, 낮에는 주무셨던 기억이 난다.




왜그리도 가난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내게는 철없는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번듯한 직장없이 가수를 꿈꾸며 가끔 지방 스탠드바(무대가 있는 주점이다)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집에 있기 일쑤였다. 당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폭력도 자주 행사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집안의 생계는 모든게 어머니의 온전한 몫이었다.


나 역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릴적 주인집 아줌마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기억 그리고 새벽에 일 나가던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지말라고 나도 같이가고 싶다고 띵깡부리던 기억이 난다.

그러기에 집에 어머니가 있던 친구들을 여간 부러워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그쯔음 어머니의 악착같던 성격이 빛을 발했다.

어머니는 조금씩 조금씩 모은 돈으로 백사번지에서 연립으로 이사를 하셨다.

아버지 역시 취업을 하셨다. 친구의 소개로 주점에서 무대를 꾸미는 일을 얻게되신 것이다.

내 나이 8~9살 때의 일이었다.


그 연립은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집의 형태를 갖춘 첫 집이었다.

물론 전세이긴 하나, 수세식 화장실이 있고, 방이 3개며 부엌이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때부터 우리 집의 형편은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다.

아버지도 이제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가정에 충실해지시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우리집은 간혹 아버지의 폭주(?)가 있긴 했지만, 이전 삶에 비하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다.

나 역시 반에서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 나이 10살 때 자그마한 17평자리 아파트를 사셨다.

첫 우리 소유의 자가였다.

그리고 드디어 어머니도 우유배달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사셨다.

지금 내가 기억하는 내 유년시절 중 행복했던 기억들은 대부분 이부근 시절이 다였다.


중학교 2학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의 행복은 그렇게 계속 될 것만 같았다.




중2병은 개나줘버려

중학교 2학년 시절은 중2병이라고 해서 정서적으로 가장 예민한 시기인 만큼 부모들이 각별히 신경을 쓴다.

그만큼 중2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이다.


그러나 내 중학교2학년 시절은 부모로부터 정서적 감정의 추스림을 받기는 커녕 엉망진창 그 자체였다.


역시 이번에도 아버지가 문제였다.

몇년 아버지 다운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결국 사람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내 나이 중학교 2학년 시절 아버지는 사업을 하신다고 직장을 그만두셨다.

그리고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사업을 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제대로 된 사업도 시작하지 못한 채 그대로 사기를 당하셨다.

여기에 사업을 하신다면서 다른 여자와 바람까지 피셨다.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버지는 매일 같이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였다.

사실 처음에 이 사실을 몰랐을 때 나는 어리둥절했다.

중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한테 맞은 어머니는 다른 쪽 방(내가 쓰는 방)의 침대에 누워계실 때가 자주 있었고, 아버지는 친할머니와 다른쪽 방(안방)을 차지하고 어머니에게 욕을 하고 계셨다.


매일 밤 나는 울었던 기억이 난다.

배게에 얼굴을 파묻고, 매일 울었다.

그리고 밤에는 아버지가 다시 집에 들어와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할까봐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만 들리면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병에도 걸렸었다.


그렇게 나의 중학교2학년 시절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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