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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Dec 01. 2021

전설의 음악당,
'게반트하우스'

세 차례에 걸쳐 다시 지어진 음악당, 그 숨겨진 비밀


음악가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뮤직 리그 오브 레전드


'바흐의 도시' 라이프치히(Leipzig)에는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음향이 아름답다는 전설적인 음악당이 있었다. 바로 '게반트하우스(Gewandhaus)'다. 게반트하우스는 19세기에 유행한 장방형(Shoebox type)의 음악당이 도래하기 전에 초기 음악당의 전형을 나타내고 있다. 도면에서 보이듯이 기다란 평면에 양쪽 끝단이 곡선으로 돼 있고, 무대가 그 한쪽 끝에 배치돼 있다. 객석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무대에 가까운 객석은 무대를 쳐다보지 않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이것은 중세 고딕 성당의 성가대석에서 유래한 배치 형태다. 2층에는 벽을 따라서 갤러리(Gallery)가 있어서 객석이 다 찬 이후에는 사람들이 이곳에 서서 음악을 듣곤 했다.



홀의 길이는 약 23m, 폭은 11.5m, 높이는 7.4m로 매우 콤팩트한 체적과 깔끔한 울림을 지녔다. 게반트하우스는 목조로 지어졌는데, 실내도 바닥과 벽 천정까지 모든 부위가 목재로 구성됐다. 천정은 평평하지만, 그 위에 반자가 구성돼 저음을 흡수했다. 게반트하우스의 실내는 예쁜 장식과 페인트 마감으로 아름답게 치장돼 있다. 오케스트라 무대는 약 50~60명의 연주자를 수용했는데, 무대의 면적이 전체 바닥 면적의 약 1/4을 차지할 정도로 컸다. 무대가 약간 올라가 있거나 객석 쪽으로 돌출해 있는 모습은 당시의 커피점(Coffee House) 형태를 띠었다.


게반트하우스는 고전음악 연주에 필요한 이상적인 요소를 다 갖추고 있었다. 콤팩트한 체적과 강한 소리를 낼 수 있는 넓은 무대는 물론, 목재 마감으로 인한 저음의 흡음과 관객에 의한 중고음의 흡음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공간이다. 당시 게반트하우스는 약 1.3초의 잔향시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매우 명료하고 깨끗한 소리를 전달하는 데 최적의 조건이었다. 다이내믹한 사운드가 객석의 가까운 곳에서 울려 퍼짐으로 인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게반트하우스는 아름다운 인테리어와 훌륭한 음향으로 인해 당시에 최고의 음악당으로 자리매김하며 모든 음악가가 이곳에서 연주하기를 희망했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객석 수가 400석으로 여유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1781년 완공돼 약 113년 동안 유럽 최고의 음악당으로 군림하던 게반트하우스는 더 넓은 공연장의 필요에 따라 1884년 철거됐다. 이후에 새롭게 석조로 다시 지은 게반트하우스를 노이에스 게반트하우스(Neues Gewandhaus), 이전의 게반트하우스는 알테스 게반트하우스(Altes Gewandhaus)라 구별해 불렀다. 


알테스 게반트하우스의 내부 (1781), 현대의 콘서트홀과 달리 좌석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2층 갤러리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게반트하우스와 뗄 수 없는 음악가는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이다. 멘델스존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15세가 되기도 전에 오페라와 실내악곡, 피아노곡, 협주곡을 작곡해 '19세기의 모차르트'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는 바흐, 헨델, 베토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곡가이자 독일의 유명 작곡가의 걸작을 발굴한 공로자이기도 하다. 그는 젊은 나이에 독일의 유서 깊은 악단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바로크 및 고전주의 음악들을 발굴해 세상에 널리 알렸다. 초연 이후 100년 간 묻혀있던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다시 무대 위에서 부활시킨 것도 그였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음향과 소리에 관한 많은 연구에도 힘썼다. 그는 특수한 악기를 사용하거나 악기 편성을 바꾸려 하기보다 고전미에 자신만의 감각을 더해 새로운 음향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악기의 기량과 소리의 시너지를 끌어내려는 노력과 인문학적 감수성, 밝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은 좋은 교향곡들을 탄생시켰다. 


멘델스존 교향곡 제3번 '스코틀랜드' - 연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전통을 잇는 음향감, 

되살린 고전주의의 음악성

 

두 번째로 지어진 게반트하우스는 1884년에 1,560석 규모로 완공됐다. 다른 도시의 장방형 공연장보다 작은 규모로 지어졌는데, 체적 또한 상대적으로 콤팩트해서 잔향시간이 약 1.55초로 비교적 짧았다. 그 이유는 이전에 있었던 알테스 게반트하우스에서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게반트하우스는 1781년에 지어져서 18세기 후반의 고전주의 음악의 산실이었다. 짧은 잔향시간(1.3초)에 맑고 깨끗한 음향을 가지고 있었다. 라이프치히의 음악가들은 이에 대한 향수와 지금까지 들어 온 음향에 가까운 소리를 원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음향적인 환경이 전통적인 바로크음악과 고전음악의 많은 작품이 연주된 배경이었다. 즉, 게반트하우스의 전통을 이어서 큰 스케일의 낭만주의 음악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고전음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타협점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좌) 노이에스 게반트하우스의 초기 내부모습(1886) (우) 노이에스 게반트하우스의 평면


장방형의 음악당들은 몇 가지 중요한 음향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상대적으로 좁은 객석 바닥면적이다. 20세기의 대형 음악당이 3,000석이 넘는 것에 비하면 좌석 수는 200석 정도라 적은 편이지만, 사람들이 비좁은 좌석에 밀집해 앉게 돼 있어서 음향의 친밀도(Intimacy)가 높다는 것이다. 즉, 어떤 단면상으로도 객석이 오케스트라와 멀리 떨어져서 음선(음파가 퍼져나가는 방향)이 멀어지는 경우가 없다. 이것은 현대 음향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음향 요소다. 친밀도가 높으면 관객 스스로가 오케스트라 가까이 있는 청각적인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좁은 바닥면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체적(부피)을 제공하는 높은 천장과 합해져서 풍부하고 충만한 음향감을 창출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체적(부피)과 바닥면적의 비율은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옷을 입은 관객이 중음역부터 고음역의 소리에너지에 대한 매우 강한 흡음체이기 때문이다. 


(상) 노이에스 게반트하우스의 외관 (하) 노이에스 게반트하우스의 단면


1891년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공연 장면을 그린 작품이 있다. 무대 중앙의 지휘자가 당시 게반트하우스의 한때를 풍미하던 멘델스존인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림 속에는 전형적인 박스형의 공연장에서 성장한 관객들이 음악에 집중하고 있고, 예외 없이 장방형 음악당의 객석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점은 이층 측벽 열에 있는 갤러리가 계단식으로 배치돼 있어서 훨씬 무대의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음선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게반트하우스의 공연모습(1891년 작품)


신축한 게반트하우스는 당시에 매우 유명했던 콘서트홀이었으며, 이전의 게반트하우스에 이어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음향을 가진 음악당으로 평가됐다. 또 하나의 게반트하우스 전통은 당시에 새롭게 작곡된 곡(Contemporary Music)을 연주하지 않고, 이미 음악적으로 완성되고 인정된 고전음악과 낭만 음악 즉, 게반트하우스가 건립되던 당시까지의 곡만을 주로 연주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고전 작품들의 음악성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게반트하우스의 음향을 맞춰 지었기 때문이다. 이는 음악과 공연장의 밀접한 상관성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게반트하우스는 바흐부터 멘델스존까지 독일음악을 대표하는 진정한 음악인들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이 음악당은 1944년 2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군수공장이 많았던 라이프치히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으로 전부 파괴되었다. 정밀하지 않은 폭격으로 인하여 전파된 이 사건은 건축사나, 음악사를 통틀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후 1984년에서야 라이프치히에 세 번째 게반트하우스가 건립됐는데, 이 공연장은 매우 현대적인 모습으로 지어졌다. 객석의 배치 형식은 베를린의 필하모니 홀(Philharmonie Hall)에서 쓰인 포도밭(Vineyard) 방식으로 구성됐다. 


직접 촬영한 (좌) 게반트하우스의 현재 모습 (우) 게반트하우스의 내부모습


게반트하우스는 독일의 라이프치히를 떠나서 음악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공연장이다. 서양음악을 만들었던 음악당의 효시부터 19세기를 대표하는 명문 음악당으로 공연문화의 기준을 세웠던 곳이며, 현재까지도 현대음악당의 지표로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서양음악의 발전과 새로운 공연문화의 지평을 열어간 문화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한찬훈 (충북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건축학 박사이자 충북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전 한국음향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아태지역 국제음향학회(WESPAC) 회장을 거쳤다. 안산 문화예술의 전당, 부산 국립국악당, 광주 아시아 문화예술의 전당, 인천국제공항 등 100여 프로젝트의 건축음향 작업에 참여했으며 모두가 사랑해마지않는 서초 예술의전당 음악당을 비롯한 오페라극장, 리사이틀홀도 그의 손 끝에서 탄생했다. 어쩌면 우리가 듣는 첫 음은 그가 그리는 종이 위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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