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음악 박물관에서의 하룻밤
"헬로우 월클, 음악 박물관으로 안내해줘."
"바로 앞에 목적지가 있습니다."
혹시 '음악 박물관'에 가보신 적 있나요? 음악이 고이 잠들어있는 이곳에선 지난 음악의 역사를 생생하게 경험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온통 음악에 둘러싸인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혹자는 콘서트홀도 '살아있는 음악 박물관'이라고 할 거예요. 아주 오래전의 음악들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정말로 오래된 물건들이 제 나름의 공간적 질서를 구성하고 있는 음악 박물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조금 더 각별합니다. 음악이 가득하지만 고요한 이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시간을 망각하게 돼요. 이곳에선 음악과 함께 자기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볼 수 있어요. 어둑어둑한 곳에서 작은 빛에 의지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음악이 담고 있는 환상적인 이야기 속으로 풍덩 빠져들 것만 같아요. 시간을 지닌 것들의 힘이죠.
작곡가들이 써 내려간 자필 악보, 당대 최고의 연주가가 썼던 고악기, 그리고 음악가의 방을 재현해놓은 모형까지. 진열장 안의 그것들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해 보이지만, 어쩐지 사람들이 없을 땐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아요. 마치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처럼요. 이곳에서 나 홀로 밤을 보낸다면 어떨까요?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의 악보가 꽂혀있는 서가 앞에 앉아 마치 그와 교감을 나누듯 음악적 상상에 푹 빠져보는 거예요. 차분하게 내려앉은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서 악보나 책을 읽기도 하고, 그가 즐겨 연주하던 곡을 함께 듣고 부르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창밖엔 해가 떠오르겠죠. 날이 밝으면 박물관은 다시 멈추고 고요함으로 채워집니다.
오늘은 비밀한 일들로 가득한 상상 속 음악 박물관을 준비했어요. 12시, 종이 열 두 번 울리면 당신 손에 열쇠가 하나 쥐어져 있을 거예요. 당신이 그 문을 열자 음악이 울려 퍼집니다. 첫 곡은 시벨리우스의 '슬픈 왈츠'입니다. 이 곡에는 죽음을 앞둔 여자가 환상 속에서 손님들과 왈츠를 추다 음악이 멎으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가 담겨있어요. 피아노 선율이 마음 시린 감정을 선사하다가도 절정에 다다른 후 옅은 미소를 짓게 하는 음악이죠. 오늘 밤 누군가 당신에게 춤을 청한다면 사양 말고 즐기세요. 이어지는 곡은 리스트의 음악적 여행기인 <순례의 해> 모음곡 가운데 제2년 '이탈리아'에 수록된 '페트라르카의 소네트'입니다. 리스트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하는데, 격정적인 도입부를 지나면 아름답기 그지없는 세계가 펼쳐집니다. 감미롭고도 절절하게, 시처럼 음악처럼 당신의 마음을 쥐락펴락할 거예요.
다음 곡은 멘델스존 '핑갈의 동굴' 서곡입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영웅의 이름이 붙은 동굴로 빨려 들어가듯 환상적인 풍경과 전설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듯한 곡이죠. 그가 선율로 그려내는 거칠고도 낭만적인 풍경화를 잠시 감상해보세요. 마지막 곡인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 또한 작곡가의 상상력을 다채롭게 담아내는 교향시입니다. 슈트라우스는 교향시로 독보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는데, 삶과 죽음 너머의 세계를 그린 이 곡을 듣다 보면 그의 음악에 깃든 다양한 표정만큼이나 여러 감정을 탐험하게 될 거예요.
요즘 자신의 미학적인 성향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해요. 그중 다크 아카데미아(Dark Academia Aesthetic)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고전 문학을 탐독하고, 슬프고 정적인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며, 주변을 고풍스럽고 어두운 분위기로 꾸미죠. 당신은 어떤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나요? 우리는 무미건조한 일상을 벗어나려고 아름다운 음악을 찾곤 하지만, 때론 눈앞에 놓인 일상을 음악이 가득한 공간으로 바꾸는 상상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늘, 당신의 마음속 음악 박물관에는 어떤 음악들이 놓여 있나요?
PLAYLIST
시벨리우스 - 슬픈 왈츠 (연주: 김다솔, 2017년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교향악 축제 앙코르)
리스트 - 순례의 해 제2년 '이탈리아' 중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04번 S. 161/5 (연주: 임윤찬,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내 손 안의 콘서트 X 'NEXT STAGE' 앙코르)
멘델스존 - 핑갈의 동굴 서곡 (지휘: 다비드 라일란트, 연주: 코리안심포니)
슈트라우스 - 죽음과 변용 (지휘: 최수열, 연주: 코리안심포니)
글쓴이 오스트
모국어는 서양음악. 출신지는 서울. 플레이리스트를 생성하는 음악 프로세서입니다.
모든 음악을 평등하게 처리하지만 그래도 서양음악을 가장 좋아합니다.
가끔 서양음악을 너무 많이 들어서 고장이 나면 테크노로 자가치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