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방-여행편]
정리할 게 많네
퇴사 결정부터 일사천리다. 다이어리의 공란은 어느새 '준비'로 가득했다. ㅇㅇ준비, ㅁㅁ준비. 뭐가 이리 많은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준비 공포증'이 오는가 싶었다. 들이마시는 숨보다 내뱉는 숨이 더 많아졌다. 42.195km를 단거리처럼 뛰고 있었다.
새로운 게 늘어난 만큼 포기할 것도 많았다. 그동안 누렸던 생활을 자연스레 벗어 던져야 했다. 쉽지 않았다. 이미 많은 것들이 소화돼 내 몸 깊숙하게 퍼진 탓이다. 웃프게도 당장 물질적인 부분은 포기할 게 많지 않았다. 미래 수익은 생각할수록 답답해지니 패스했다.
예방 주사
세계에는 다양한 풍토병이 있다. 때문에 여행 전 예방 주사는 필수다. 특히 아프리카·남아메리카를 여행하기 위해선 특정 질병에 대한 예방 접종 확인이 필요하다. 항체 형성을 고려해 출국 최소 15일 전 예방 접종을 마치는 게 좋다. '항체 형성'이 안되면 사실 다 꽝인 거다.
황열병·A형간염·파상풍·장티푸스. 내가 선택한 예방 주사는 4가지였다. 누군가 많다고 하겠지만 적당히 타협한 수준이다. 중독은 물론, 하늘을 나는 기분을 준다는 주사도 아니지 않나. 비용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같은 주사의 비용이 의료기관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그래서 만든 게 '예방 주사 투어'였다. 비용 절감을 목표로 신속·정확하게 움직였다. 병원 간 동선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짰다. 블랙프라이데이 매장을 방문한 고객의 움직임처럼 병원에 들어선 순간 목표물을 향해 나아갔다. 접수는 빠르게, 진료는 정확하게, 수납은 정중하게, 접종은 시원하게 끝냈다.
여담이지만, 접종자가 많은 날은 3시간 이상 대기하거나 백신 물량 부족으로 발길을 돌려야 한다. 눈이 벌게져 콧김을 뿜는 게 나일 수도 있다. '접수-진료-수납-접종'의 과정을 3차례 반복한 뒤 마지막 병원에 도착했다. '척하면 척' 예방 접종의 배테랑처럼 물 흘러가듯 행동했다.
문진표를 작성하던 우리에게 당황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오늘 다 맞으신 건가요? 추가 접종하셔도 괜찮으세요?
"네, 오늘 다 접종하고 이게 마지막이에요. 큰 문제가 있을까요?"
간호사를 머쓱하게 쳐다보며 답했다. 지은 죄는 없지만 뭔가 켕기는 건 그저 기분 탓인가. '3일간 금주해야 한다'는 조항을 사전에 알았다는 건 글쎄. 모른척하자. 지금 생각해 보면 미련하지만 당시만 해도 시간과 비용을 고려한 올바른 결정이라고 합리화했다.
마지막 한 방. 양쪽 어깨에 구멍 난 타이어를 때운 것처럼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몸에 들어 온 바이러스를 이겨내는 데 필요한 건 보양이었다. 바늘에 찔려 피도 났으니 절대 건너뛸 수 없었다. '4인분 같은 3인분'의 식사를 마쳤다. 이 정도면 속이 부대껴야 정상인데, 소화제 광고처럼 편안함을 과시했다.
스스로도 놀랬다. 참 뻔뻔한 위장이다. 무거워진 몸과 달리 '난 이제 천하무적이야. 거의 완벽하게 예방했어. 거의'라는 한없이 가벼운 생각을 뇌에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기 무섭게 점프하듯 온몸을 침대에 던졌다. 빨랫줄에 걸린 옷마냥 축 늘어졌다. 오징어인가도 싶었다. 그러곤 시체처럼 잠들었다. 눈 떠보니 해는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볼까'라는 생각과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데, 침대에 묶인 것마냥 미동도 없었다. 물 먹은 숨처럼 더 가라앉았다. 딱히 어디라고 꼽을 수 없지만 몸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댔다. '으슬으슬'. 춥고 기력이 없었다. '몸살이구나'. 그제야 간호사의 한마디가 머리에 울려 퍼졌다.
-이렇게 많이 맞으면 몸살 기운이 올 수 있어요
무리였나보다. 그래도 체력을 잃었지만 항체를 얻었다. 아주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위안이었다.
정리가 필요했다. 그것도 깔끔한 모양으로다. 일단 눈에 보이는 행정적인 부분을. 답이 있고 길을 따라가면 되는 것이었다. 처리할수록 엄지가 들렸다. 여행 이후 더 와 닿지만, 우리나라의 행정 시스템은 '친 여행자'로 평가해야 한다.
답을 찾아야 하는 것도 있었다. '관계 정리'. 이 문제는 어렵고, 푸는 방식도 여러 가지다. 답도 하나가 아니다. 결과는 오롯이 내가 책임져야 한다. 전화를 들고 연락처를 살폈다. 이름이면 다행이다. 전화 걸어 누군지 알고 싶을 정도의 암호문과 점 하나(·)로 퉁쳐진 사람도 있었다. '누구·누구지·누구세요'는 도대체 뭘까.
각설하고, 수많은 사람이 나오지만 연락하지 않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일 년에 한 번, 명절에 한번, 한 달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연락의 빈도와 실제 만난 횟수는 거의 일치했다. 다시 나눴다. 매번 내가 먼저 연락하는지, 상호 연락하는지. 너무도 뻔하지만 내가 질질 끌고 온 삶의 편린이 많았다. 하지만 '날 우선시한 관계'처럼 의외도 있었다. 적당히 '답'이 나왔다.
여행 소식이 알려지자 일단 '보자'는 사람이 많았다. 짧아야 1년. 얼굴 한 번 더 볼 욕심에 매일 저녁 자리가 이어졌다. 여행을 위해 길렀던 체력이 바닥났다. 소리는 요란하지만 출력이 달리는 무선 청소기처럼. 같은 질문과 답이 이어졌다. 이럴 거면 Q&A를 뽑아 올 걸 그랬다. 그래도 맛있는 음식으로 위장에 기름칠하니 뻑뻑함은 사라졌다. 문제는 '치킨은 살 안 쪄요. 살은 나만 쪄요.' 그랬다. 또 다른 '몸' 살이었다.
만나고 또 만났다. '회사'라는 껍데기를 벗고 만난 사람부터 어린 시절의 인연까지. 그들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어떤 삶을 살았는지' 더 명확해졌다. 모든 만남이 유쾌한 건 아녔다. 안타까운 사고나 선행 기사에도 악플이 달리는 세상인데 어떻게 곱게만 보겠는가.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 집 마련'은 그렇다 쳐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상사는 왜 걱정하는지. '여행 갔다 와서 이혼하는 사람도 있다더라'. 잔에 담긴 소주를 붓고 싶었다. 예방 주사란 게 신기하다. 풍토병을 예방하고자 맞은 주사에 몸이 아프고 회복한다. 같은 예방 주사라도 사람에 따라 아픈 정도가 다르다. 그리고 모기와 같이 병을 옮기는 매개체가 있다. 예방주사를 세게 맞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