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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비곰 Jan 01. 2021

'따르릉' 한밤 중 걸려 온 협박 전화

[시간이 멈춘 방-현실편]

협박


남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위협하는 행위. 대한민국의 형법에서는 상대에게 공포심을 일으키기 위해 생명·신체·자유·명예·재산 따위에 해(害)를 가할 것을 통고하는 일을 말한다.


협박죄의 성립요건


사람에게 협박 행위를 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로 사람을 협박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500만 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


'협박'의 의미에 관해서는 협박을 통해 상대방이 실제로 공포심을 일으켰는지 여부와 협박의 내용이 상대방 행위에 제한을 가져올 정도인지에 따라 학설이 대립한다.


대법원은 협박의 의미를 '일반적으로 그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정도의 해악을 고지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르릉따르릉


해가 고개를 숨긴 지 오래였다. 하루의 마무리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사건은 뜻하지 않은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됐다. 늦은 밤 정막을 깨고 울리는 전화 벨소리. 발신자를 확인 후 받을까 망설였다.


늦은 밤 전화 9할이 '취중 진담'을 가장한 '취중 넋두리'거나 '방언 터진 훈장님으로 변신한 사람'일 확률이 높아서다. 아뿔싸 '오랜만'이 주는 반가움 함정에 빠졌다.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내가 뭐라고 불러줄까"


C 씨의 찌든 목소리. 숨소리마저 불안했다. '홈 스위트 홈' 나의 달콤한 집 안방에서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다. 술기운에 더해 아가리 똥내가 전화기 너머로 밀려왔다.


C와의 인연은 나름 깊다. 나이 어린 선배지만 이직자·막내기자로 공감대를 형성해 '상사 뒷담화'로 방점을 찍었다. 개인적 얘기는 많이 나누지 못했지만 일하면서 생긴 스트레스와 문제를 같이 욕해대며 풀었다.


당시 나의 스트레스는 극악했다. 스마트폰 기본 벨소리만 울려도 경기하듯 반응했다.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라고 해야 하나. '또 무슨 일이지. 실수한 거 없는데. 어떤 부분 때문이지'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기껏 2초다.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7대 3의 비율. 벨소리에 경기 일으킬 정도면 지적이 7 인건 당연한 얘기다.


혹독했다. 겨울에 팬티 바람으로 쫓겨나고 여름에 가죽 재킷 입은 수준. 맨바닥에 구르고 굴렸다. 대신 많이 배웠다. 지금은 웃으며 얘기한다. 날 맨 땅에 굴렸던 분과도.


당시 C도 그랬다. 아쉽게도 그의 이직과 나의 부서 발령으로 관계는 소원해졌다. 얼마 후 난 훌쩍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한국에 돌아왔다.


"어이, 뭐라고 불러줄까? 형이 라고 불러줘, 어? 형 대접받고 싶으면 말해"


'저기요. 시작부터 반말 인뎁쇼.'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정신 차려. 어설프게 낚이지 마라' 잠들다 만 뇌를 깨우듯 머리를 한대 쥐어박았다.


오해를 살까 미리 말하지만, 기자 생활 중 나이 어린 선배에게 대접받고 싶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못 믿을 수 있겠지만 사실이다. 영화학과 생활로 익숙한 선후배 구조, 군대 선후임 구조. 그냥 체득화됐다.


'나이 어린 후배'. 고깝게 여기면 한도 끝도 없다. 하지만 '나이 많은 후배' 포지션. 썩 나쁘지 않다. 적당한 예의와 겸양만 갖추면 노력의 결과가 2배로 돌아온다.


"아니요. 선배"


사회성 만렙 웃음을 띄웠다. '이제 어떻게 대응하지.' 뇌를 풀가동했다. '근데 내가 이렇게 말 못 한 적이 있나?' 하루라도 말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 사람처럼 떠드는 게 내 캐릭터인데.


힙합 경연 프로그램 '쇼미 더 머니'에서 가사를 절었던 어느 래퍼처럼 나 또한 대답을 절고 있었다. 너무 당황한 건가. 말이 입에서만 맴돌았다.


기자는 입사 연도가 깡패다. 나보다 한참 어린 선배가 많았고, 그 역시 그랬다.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예비 기자가 현실을 마주한다면 현기증부터 날 것이다.




잠시 옆길로 샌다. 막내 기자 시절, 선배들에게 들었던 말이다.


"서로 동등하다는 의미로, 술은 한 손으로 받고 한 손으로 따른다. 술 마실 때 고개 돌리지 않는다. 담배와 같은 기호는 묻지 않고 핀다. 기자끼리 높임말 '님'은 붙이지 않는다. 부장님 아니다. 부장·국장으로 부른다."


언젠가 "네~부장"으로 통화를 끝내자 주변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이유를 설명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조직 문화라며 머리를 젖는 사람도 있었다.


동등을 논하는 겉치레가 상급이다. 근데 허울만 좋다. 과거에는 맘에 안 들면 조인트를 까거나 귀싸대기를 때리던 조직이었는데 말이다. 나도 처맞아 봤다. 당시 펜은 확실히 칼보다 강했다.




전화 상 공기는 더없이 무거워졌다. 답이 없는 전화에 고개를 꺄웃하며 전화기를 내려다봤다. '전화가 끊어진 건 아니고. '더럽게 어색하네' 입안이 썼다.


"한국 왔다면서 연락도 없네. 여행 갈 때도 연락 한번 없더니... 예전엔 맨날 밥 얻어먹으려고 전화했으면서"


명치를 아주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한국 들어온걸 어디까지 보고해야 하는 거냐. 그리고 대뜸 하는 얘기 요점이 '식충이 쓰레기'냐. 거지새끼 취급은 아니지 않나.' 헛웃음이 터졌다.


그의 말처럼 전화는 했다. 근데 앞뒤가 빠졌다. 이직 한 그와 끈을 유지하기 위한 행동이었지, 다른 의도는 없었다.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뭐냐. "밥 한 끼 해요?!" 이 말 아닌가.


밥을 먹어도 좋고 안 먹어도 그만인데, 저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 내가 나빴네. 내가 양아치였네.' 포기하면 쉽다. 사람 맘이 다 내 맘 같지 않다고 했으니.


어떤 말이 쏟아질지 흥미진진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나올 거니. 아니면 라떼는 말야로 시작할 거니.' 전화를 들지 않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기대된다. 네 말이 참.'


"요즘 뭐해"


"앞으로 할 일에 대해 고민도 하고 알아보고 있어요"


"와~이 형 먹고살만한가 보네. 어떻게 내가 어떻게 힘들게 만들어 줄까? 한번 만들어줘"


숨 돌릴 틈 없이 날아온 한마디였다. 미간에 역 팔자 주름이 잡혔다. '뭔 얘기지.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애써 부정했다. 하지만 누가 들어도 그의 말은 '내가 너의 취업을 방해할 수 있는 갑이다'였다.


일상 물로 시작한 영화 장르가 협박 범죄로 변했다. 하지만 나의 대답 자세는 한결같았다. '어버버와 어눌'. 누군가 "화냈어야지"라며 답답해 할 수 있다. 마음으론 이해한다.


하지만 나의 방어권을 위해 최대한 선배(?)를 존중해야 했다. 전에 뒤통수를 세게 맞아봐 아는데, 감정적 대응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특히 이 업계는 평판이 반이다. 앞뒤 떠나 선배한테 개지랄 떨면 역풍 맞기 딱 좋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그의 무례함보다 나의 맞대응을 더 고깝게 볼 것이다.


결정적으로,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녹음되고 있을 거란 의심이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기자 짓으로 밥 벌어먹던 사람인데. 전화를 건 순간 자동 녹음 기능이 켜졌을 것이다.


"광화문 나오면 연락해. 밥이나 먹게"


"네. 가기 전에 전화드릴게요"


"전화하라고 그냥. 그리고 나 요즘 잘 나가…"


"네?"


"나올 때 와이프한테 카드 받아서 나와. 나 요즘 10 단위 안 먹어. 요즘 100 단위야"


"네? 뭐~암튼 그럴게요"


듣기 싫은 말에도 몸이 긍정 신호를 보냈다. '무슨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10 단위? 100 단위? 10만 원·100만 원 같은데. 카드를 들고 나오라는 건 접대하라는 건가?


무슨 말인지 모를 대화였다. 언어영역 전문가에게 해석을 맡기고 싶을 만큼. 전화를 끊고 손에 쥔 전화기를 멍하니 바라봤다. 옆에서 줄 곧 눈치만 보던 와이프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말하며 상황을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와이프는 '말까지 더듬고 그래서 큰일이 생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억울함에 가슴이 막혔다. 붉게 물든 눈동자. 답답한 가슴만 주먹으로 내리쳤다.

들끓는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범죄 영화도 아니고. 이 모든 상황이 블랙 코미디 같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제라도 본인 스스로 쓰레기통에 들어가 준거다. 울화가 치밀지만 고맙다. 또하나의 분리 수거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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