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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지 Aug 15. 2021

꿈꾸는 물거품

물거품이 된 후의 인어공주 이야기

  



  옛날 옛날에, 깊은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며 살던 인어공주가 살았답니다. 그녀는 어느 날 폭풍우를 만난 배 위의 왕자님에게 첫눈에 반해 글쎄, 가족들의 마음도 등진 채 마녀의 힘을 빌려 바다를 떠나 왕자 곁으로 갔다가 결국에는 다른 여자와 약혼까지 한 왕자를 위해 물거품이 되어 버렸죠. 그 시절 불쌍하도록 한심한 왕자 덕후라고 할 수 있겠네요. 네, 그래요. 그게 바로 저랍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몰랐던 물거품이 된 후의 내 이야기를 해보려 해요.


  물거품이 되어버린 나는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었어요. 아주 조금의 물이라도 있다면 말이죠. 만약에 왕자가 내가 사라진 걸 알고 한 방울의 눈물이라도 흘려줬다면, 난 아마 그 눈물 위로 피어올라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말해줄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죠. 그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거든요. 그때서야 나는 내가 얼마나 부질없는 마음을 줬는지 깨달았어요. 너무나 화가 나서 물보라를 일으켜서 그가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배를 뒤집어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죠. 하지만 물거품이 된 내가 아무리 화를 내봤자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물방울 몇 개 만들어내는 게 다 였답니다. 너무너무 억울해서 나는 나를 이렇게 만든 마녀를 찾아갔아요. 도대체 나에게 이렇게 불공평한 마법을 걸은 이유가 뭐냐고 따졌죠. 그녀는 물거품이 된 나를 손짓 몇 번으로 휘휘 저어 흩어지게 만들어 버리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어요.


  “넌 그때 네 소원은 왕자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했지. 그게 안된다면 잠시라도 곁에 있기라도 하고 싶다고 했었어. 내가 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했는데도 말이야. 제정신인가 싶었지. 그깟 남자가 뭐라고. 그놈이랑 말을 해보기라도 했어? 그놈에 대해서 뭘 알아? 그놈이 너를 사랑해주기라도 하든? 그것도 아니잖아, 그러니 나는 네가 그놈을 죽이고 돌아올 줄 알았지. 설마 하니 정말로 물거품이 되는 걸 선택할 줄이야. 오 맙소사. 한심해서 말이 안 나오는군.”

  

  마녀는 흐느끼기 시작하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수정구슬을 꺼내 아주 귀여운 고래 한 마리를 보여주었어요. 그러더니 이어서 말했죠.


  “귀여운 녀석이지. 내 가장 친한 친구였어. 그런데 네가 좋아했던 그 잘난 왕자가 이 귀여운 녀석에게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작살로 찍어 죽였어. 짐이 고래 사냥에 성공했도다. 그저 자랑하기 위해서. 너는 물거품이 되어서는 안 됐어. 그놈 심장에 칼을 찔러 넣고 나 대신 복수를 해줬어야 했다고! 그리고 바다로 돌아오든 거기서 두 다리를 가지고 살든, 너 자신을 위한 꿈을 꾸고 살았어야 했어. 행복하고, 씩씩하게. 나는 괜히 그저 너를 골탕 먹이기 위해  물거품 저주를 건 게 아니란다, 아가야.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죠. 마녀는 나를 한껏 비웃으며 말했어요.

 “덕분에 내 손녀들이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이야기가 하나 나오긴 하겠구나. ‘인어공주,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대가, 물거품이 되다…….’”


  한껏 빈정거린 마녀는 작은 상자에서 빛나는 진주를 꺼내 주며 말했어요.


 “내가 건 저주이지만 한 번 걸은 이상 내게 그걸 되돌릴 수 있는 힘은 없단다. 하지만 네게 물거품 저주를 걸 때, 한 가지 조건을 걸었지. 그걸 알아내는 것은 너의 몫이야. 이 진주를 가지고 가렴. 심해는 어두우니까. 언젠가 깨달을 날이 올 거야.”


  하지만 그때의 나는 마녀의 말에 더 깊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답니다. 힘 없이 물거품으로 진주를 감싸 안고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심해로, 더 심해로 들어갔어요. 그곳은 칠흑 같이 어두워서 진주도 더 이상 빛을 낼 수 없었고, 생김새도 알 수 없는 심해 생물들이 가끔 무서운 소리를 내고는 했답니다. 하지만 물거품이 된 내가 더 두려울 것은 없었어요. 그때의 나에게는 그저 절망과 슬픔뿐이었으니까요. 내가 겨우 조금 기운을 차리고 다시 마녀를 찾아갔을 때에는 마녀가 죽고 없지 뭐예요.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흐른 줄도 몰랐어요. 그래서 이 진주가 무슨 의미인지 알 방법은 사라져 버렸답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절망의 심해에서 아주 오래오래 표류하며 잠들어있었답니다.



  

  나를 깨운 건 심해를 탐사하러 온 잠수정이었어요. 그게 뭔지 난 알 턱이 없었죠. 그저 빛이 닿지 않는 심해에 갑자기 나타난 노란 불빛에 놀랐답니다. 이렇게나 깊은 바닷속을 탐험하는 배를 만들어내다니. 세상이 얼마나 변한 건지. 잠에서 깨어난 나는 그제야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곧 깨달았죠. 예쁜 분홍빛이던 산호 숲은 이미 하얗게 폐사하고 말았고, 정체불명의 쓰레기들이 떠다니는 바다로 바뀌었다는 것을요. 나는 고래들을 찾아갔어요. 고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의 바다가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되었죠. 인어들도 아주 오래전에 종적을 감춰버렸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중에 한 고래가 내가 갖고 있는 진주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어요. 나는 저주를 풀 단서를 찾은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그곳이 어디냐고 물었죠. 고래는 나를 난파한 어느 선체로 데려다줬어요. 어두운 배 안에는 정말로 밝은 진주가 많았답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나는 곧 그것이 진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건 아이들의 영혼이었으니까요. 어떤 사연으로 이 어두운 바다에 머물러 있는지 알 수는 없없지만 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어요. 놀랍게도 그 아이들 모두 내가 왜 물거품이 됐는지 알고 있더군요.


[당신이 그 인어공주 라고요?] 라면서요.

 

  나는 아이들을 통해 봄날의 햇볕을 받으며 벚꽃길을 걷는 일이 얼마나 낭만적인지 알게 되었고, 가족들과 맛있는 것을 먹으러 나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떠올리게 되었고 단풍잎이 얼마나 아름다운 빛깔인지, 발자국 없는 눈 덮인 학교 운동장에 첫 발자국 찍는 일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알게 되었어요. 쉬는 시간에 매점에서 줄을 서서 사 오는 간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시험 마지막 교시 종이 치면 시험을 잘 봤든 못 봤는 얼마나 신이 나는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관람하는 게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지도요. 차갑고 어두운 심해에서 표류하던 나는 아주 오랜만에 따뜻함을 느꼈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이 깊은 바다에서도 진주보다 빛나고 있는 건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다들 그 꿈만큼 밝은 진주 빛을 띠고 있더군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미 오래전 빛을 잃은 나의 진주가 조금씩 빛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아이들은 나에게 나의 꿈은 무엇이었냐고 물었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죠. 지금 나의 꿈은 너희를 더 밝고 따뜻한 곳으로 보내주는 것이라고요. 그러자 한 아이가 말했어요.


  [당신은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했죠?]

  [그렇단다.]

  [그렇다면 우리 엄마 아빠가 아직도 많이 슬퍼하는지 나 대신 보고 와 줄래요? 나는 잘 지내겠다고 나 대신 말해줄래요?]


  나는 그러겠다고 했죠. 아이들의 가족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그리움을 삼키며 잠드는 저녁마다 흘리는 눈물이 있었으니까요. 나는 아이들의 부모와 형제들을 찾아가서 그들이 흘린 눈물 속에 피어났죠. 울다 잠든 그들의 머리맡에서  아이는 따뜻하고 밝은 다른 평행 세계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있다고 말해줬어요. 구두 디자이너를 꿈꾸던 아이가 만든 구두는 누구나 탐을 내는 아름다운 구두가 되었고, 엄마가 좋아하는 색깔이 아이가 만든 구두 브랜드를 대표하는 색깔이 되었다고 말해줬죠. 언니가 만든 구두에 맞는 옷을 디자인하고 싶었던 동생의 머리맡에 피어올라서는 함께 모로코에 있는 디자이너 입생로랑이 살았던 집의  파란 정원에서 사진을 찍자고, 화려한 색채가 아름다운 모로코의 시장에서 마음껏 영감을 얻고 다니자고 했던 약속을 속삭여줬어요. 나중에 동생이 모로코를 방문하게 되면 언니는 분명 그곳에 함께 있을 거라고도요. 작가가 꿈이 었던 아이가 쓰고 싶었던 책에 대해서도 말해줬어요.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는 책이라고도 덧붙였죠. 몸이 약했던 친구는 그곳에서는 튼튼하게 배우고 싶던 춤을 열심히 연습하며 즐거워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사랑하는 사람이  이상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는 아이들의 마음도 전해줬어요. 그리움을 안고 잠든 가족들이 슬픈 꿈을 꾸지 않도록,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이 꿈속에 투영될  있도록 자세하게, 밤이  도록, 마침내 눈물이 마르고 희미한 미소가 떠오를 때까지,  잠든 그들 옆에서 이야기해줬답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생겼어요. 나약하기 그지없던 물거품인 내가 좀 더 단단해지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나는 더 힘을 냈죠. 온 힘을 다해 아이의 꿈의 빛깔과 가장 닮은 진주를 가져왔어요. 그걸 내가 다녀간 자리마다 남겼죠. 꿈에서 깨면, 그저 꿈이 아니라 정말로 아이가 전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요.  가족의 미소를 전해 받은 아이들은 하나, 둘씩 차갑고 어두운 바다를 떠날 수 있었어요. 나는 더 밝고 따뜻한 곳으로 향하는 그 영롱한 빛들과 하나씩 작별인사를 했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한 아이가 남았을 때, 나는 더 이상 물거품이 아닌 인어의 모습으로 돌아왔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이상 눈물 속에서 피어날 수 없게 되어버렸죠. 나는 마지막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해 미안했어요. 그러자 그 아이가 말했습니다.

  

[내 꿈은 당신이 직접 우리 엄마에게 보여주세요.]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어요.





  아이의 꿈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고 싶다고 했죠. 작아도 취향대로 꾸민 자취방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말도 했어요. 한강 공원에서 야경을 감상하며 맥주를 마셔보고 싶다는 말도 했죠. 나는 그 아이의 꿈을 진주에 담아 목걸이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뭍을 향해 헤엄쳤답니다.


  

  나는 아이의 어머니를 만나 어머니가 그리움을 누르고 헤어진 아이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가 진주 목걸이를 드렸답니다. 아이는 아마 더 밝고 따뜻한 평행세계에서 남을 돕는 멋진 일을 하며 지내고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이 진주 목걸이가 어머니의 웃음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마지막 아이의 소원까지 들어주면서 나는 내가 아프게 했던 나의 가족들이 생각났어요.


[내 꿈은 당신이 직접 우리 엄마에게 보여주세요]


  지금 나는 해양환경연구원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환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답니다. 가끔은 고래들을 찾아가 의견을 묻고, 가끔은 심하게 오염된 바다의 모습을 촬영해 세계에 알리기도 합니다. 소박하지만 취향을 담은 작은 자취방에서 지내며, 가끔 한강 공원에 앉아 맥주도 마신답니다. 지나고 보니 나를 물거품으로 만든 마녀는 아무래도 용서하기 힘들었지만, 내가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내 꿈을 찾는 것을 조건으로 한 저주였다니 미워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일이 힘들 때도 있지만, 매일 저녁 어둠 속에서도 햇빛 아래 진주처럼 반짝였던 그 아이들의 꿈들을 세어보며 잠이 듭니다. 내가 꿈을 펼치며 씩씩하게 두 번째 기회를 살아간다면, 내 가족들도 다른 세계에서 나를 응원하고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요.


   포기하지 말아요. 물거품인 나도 꿈을 꾸며 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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