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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콘텐츠 읽기] 자, 지금부터 주목!

쿠팡시리즈 <가족계획>

by aboutseohyeon

[소설가의 콘텐츠 읽기] 자, 지금부터 주목!

쿠팡시리즈 <가족계획>



장르물이 긴장을 만들어 내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갈래가 있다.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

무엇을 쫓으려 하는가.


어느 쪽이든 나의 안전을 담보로 한다는 점에서 결국에는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되긴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지키려 한다는 건 아직 주인공에게 소중한 것이 있을 때이다. 반면 쫓으려 한다는 건 이미 소중한 것을 잃은 후다. 미래를 지키려 하는 자에겐 안전을 바라게 되고 과거를 파헤쳐야 하는 자에겐 진실을 바라게 된다. 물론 둘 다 위험하다. 일상은 무너지고 목숨은 위태로워진다. 목적지가 다르다고 할 지라도 장르물의 서사는 대체로 그 교차 지점, 바로 현재, 지금에 있다.


6부작으로 구성된 <가족계획>은 전자를 택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가족’을 지키려 한다. 그런데, 이 가족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목숨을 걸고 서로를 지킨다기엔 어딘가 붕 떠 있는 느낌이다. 끈끈한 정? 글쎄,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또 완전 남남처럼 보이는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린다. 그들은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니까. ‘정’으로만 이어진 가족인가? 또 그렇지도 않다. 그들에겐 한 곳에서 도망쳤다는 공유하는 과거가 있지만, 그 기억마저 온전하지 않다. 결국 식탁에 둘러앉아 궁금한 것을 하나씩 차례로 질문하면서 궁금증을 풀어가야 되는 처지다. 한 마디로 <가족계획>은 우리가 봐온 흔한 신파를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다섯 사람. 그리고 그 중심을 묶고 있는 엄마 영수(배두나 역), 오직 영수를 지키는 것만이 중요한 아빠 철희(류승범 역), 엄마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는 딸 지우(이수현 역), 철은 조금 없어 보이지만 엄마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갖고 있는 아들 지훈(로몬 역), 그리고 이제야 가족 같지 않냐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내뱉는 어딘가 의뭉스러운 할아버지(백윤식 역), 그들은 어딘가에 쫓기면서 철저히 자신들을 감추려 하고 있다. 그런 그들이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 마주한 개인적 범죄는 알고 보니 조직적 범죄였고, 그 끝엔 가족 정확히 영수를 쫓고 있는 칼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범죄는 불쾌하고, 그 범죄를 처단하는 과정은 꽤나 잔인하다. 이 잔인함을 조금이나마 희석시켜 주는 것은 속도감이다. 고구마 따윈 없다는 듯 빠른 속도로 악을 처단해 나간다. 한없이 잔인하지만 정의감은 살아 있다. 그들은 당해야 마땅한 이들만 처단한다. 오직 아들딸만 지키면 된다는 태도로 우리와 상관있는 일이 아니잖아,라고 말하는 영수 역시 일말의 계기가 생기면 망설이지 않고 나선다. 하지만 <가족계획>은 사적 복수의 영역에 있지 않다. 그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사회 정의 역시 지킬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자, 여기서 주목!


이 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드라마가 가족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 지도 아니고, 남다른 캐릭터의 매력에 대해서도 아니고, 얼마나 잔인한지에 대해서도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잔인함을 다루는 방식이다. 진짜 잔인한 게 무엇인지, 복수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지점에서 이 드라마의 차별점이 빛나기 시작한다.


최근 몇 년간 장르물이 득세했다. K드라마의 호황기에서 가장 많은 수혜를 누린 것 역시 장르물일 것이다. 범죄는 더욱 극악무도해졌고, 무너진 공권력을 한껏 비웃듯 사적 복수는 만연하고, 통쾌하다는 이름으로 악에 대한 처단, 잔인함은 극에 달했다. 시대의 변화, 현실의 반영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이러한 잔인함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나. 시선을 끌기 위해선 점점 더 잔인해질 일만 남은 것 같다. <가족계획>이라고 다르겠냐. 잔인한 장면을 기꺼이 보여준다. 음, 다를 것 없네. 하는 바로 그 순간 <가족계획>은 이 모든 게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가족계획>에서 영수의 능력, 일종의 최면이라 할 수 있는 브레인 해킹은 육체적 고통을 진짜로 가하는 건 아니지만, 육체적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며 평생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기억을 범죄자에게 심는다. 아니, 그런 놈들은 진짜 당해야 하는 것 아니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고통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 남들이 볼 땐 육체적으로 지극히 멀쩡하기에 고통을 입증할 수도 없고, 그저 미쳐가는 것밖엔 답이 없다. 아, 이토록 기발한 복수라니. 이거야 말로 어쩌면 피해자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전가시키는 제대로 된 복수일 지도 모른다. 동시에 피해자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가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고통 속에 남아야 하는 이들의 마음을, 시간이 지나도 벗어날 수 없는 그 괴로움을 대변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야겠다. <가족계획>이 엄청난 긴박감을 전해주는 장르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쩐지 진지해지려고 하면 무뚝뚝한 유머 코드가 뚝뚝 나오기도 하니까. 반드시 지켜내야만 한다고 마음을 졸이기엔 충분히 잘 지켜낼 것 같은 가족들이 등장하기도 하니까. 영수가 지켜내려는 미래는 설령 위태로워질지 언정 부서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 가족들의 태도는 어쩐지 묘하게 허탈하기까지 하다. 물론 시즌 2를 예감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이에 대한 것 역시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이 드라마를 주목! 하자는 이유는 아니니까.


그 이유는 영수가 이 가족을 지키려 하는 이유에 있다.


“내가 겪은 고통을 똑같이 겪지 않았으면 해.”


그 이유 하나로 영수는 현재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한다. 결말 부분에 다른 메시지가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 사실이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바꾸진 않는다고 본다. 주인공의 과거나 말, 모든 것이 드라마를 통해 말하는 메시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니까. 중요한 건 겪지 말아야 할 고통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그 고통 앞에 기꺼이 함께 하려는 자세다. 설령 그것이 조금 잔인하고 험난할지라도.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켜내야만 하는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가족계획>은 스릴러라는 장르와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를 잘 버무린 개성적인 작품이다. 결국 어떤 이야기의 성공을 말하는 건 장르 속에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화려한 포장지 속에서 어쩐지 계속 곱씹어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쫓고 있을까. 무엇을 보지 않기 위해 무엇을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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