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3. 수요예배 말씀나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2024. 10. 23.
본문: 마태복음 25, 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목사님께서 이번 주중에 피정을 떠나셨습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연말 정책당회와 내년 목회계획을 위해서 며칠간 기도하러 가시는데, 꼭 필요하고 좋은 일정이어서 당회에서도 흔쾌히 허락을 해드렸고, 앞으로도 해마다 이 일정은 지키실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싶습니다.
목사님께서 안 계셔서 어쩌다 보니 또 제가 예배 인도와 말씀 나눔을 맡게 되어서 부담이 됩니다만, ‘잘 해야지’ 라는 욕심을 내려놓고 평소에 제가 성경을 묵상하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바를 편하게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오늘 말씀 나눔 요청은 두 주 전쯤에 받았는데, 게으름을 부리다가 급하게 준비하느라 이야기가 두서가 없어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달란트 비유, 제목대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정도 교회를 다니신 분이라면 이 이야기를 여러 번 읽거나 들어보셨겠지요. 그리고 이 이야기에 대한 설교나 해석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주로 어떻게 이 이야기를 해석해서 어떤 교훈을 들어 보셨던 것 같으신가요??
그렇죠. 주인은 하나님 혹은 예수님, 종들은 믿는 성도들 혹은 세상 사람들,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이고 주어진 재능을 따라서 믿음 생활을 열심히 하면 천국에 가서 상을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혹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벌을 받거나 지옥에 간다 정도의 해석이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받아들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또 그 나름대로 신앙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오늘은 성서가 알려주는 내용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면 좋을까라는 제 나름의 생각을 몇 가지 말씀 드리고, 말미에 이 이야기에서 제가 묵상했던 것들을 간략히 나누는 걸로 했으면 합니다.
오늘 읽은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이야기하셨던 세 개의 연속된 비유 중의 하나. 열 처녀 이야기,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중 가운데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읽은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어떠하다를 알려주시려고 예수님께서 만드신 이야기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렇게 이야기의 성격과 맥락을 살피는 것은 중요합니다. 전체적인 맥락과 내용을 이해하고 나면, 개별적인 이야기나 개별적인 구절을 오해 없이, 빗나감 없이 자신의 삶에 맞게 묵상하고 적용할 수 있게 되지요.
성경의 기록은 다양한 내용들을 품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사실, 율법, 예언, 시, 우화적인 이야기, 환상 등이 섞여 있지요. 사실 개역개정 성경의 이야기 배치는 별로 친절하지가 않아서, 읽는 사람이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은 책에 따라서, 또 책 안에서도 내용마다 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성서의 내용을 분류하거나 해석하는 것도 바뀔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보는 것을 어떤 사람은 우화나 예언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소설책을 읽는 것과 역사책을 읽는 것 혹은 전자 제품 설명서를 읽는 건 목적도, 이해하는 방식도 전혀 다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성서에 대해서 하는 모든 믿음의 고백은 사실은 그 본문에 대한 읽는 이의 해석입니다. 글의 성격도 다르고, 쓰여진 시기도 다르고, 저자의 배경도 모두 다른 성경의 책들을 읽을 때 주의 깊은 해석과 적용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 중에 ‘성경대로 믿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은 성경대로라고 하는 것도 이미 해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분이 ‘이렇게 해석하는 게 성경대로 해석하는 거야’라고 해석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또 모든 해석이 다 맞다거나 괜찮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성서를 이상하게 해석해서 이것만이 옳다라고 주장하면 어떻게 되나요? 네, 이단이 됩니다. 우리 각자가 충분한 경험과 훈련을 통해서 나름대로 성서를 균형잡힌 시각으로 읽고 해석할 수 있으면 제일 좋습니다만,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래서 성서 해석과 말씀 선포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목회자가 필요하고, 목회자라 하더라도 혼자서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면 안 되니 교단이나 신학적 전통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한국기독교장로회라고 하는 교단에 속해 있고 우리 교단이 가지는 신학적인 입장과 전통이 있다는 것, 좀 더 범위를 넓히자면 전통적인 개신교가 공동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 다시 말하면 공통의 성서 해석과 이해가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야기가 너무 어렵고 딱딱해져서 죄송스러운데, 그런 것도 필요하고 중요하겠구나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목회자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평신도들도 어느 정도는 믿음의 경험 안에서 성서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눈을 가질 필요가 있고, 또 그런 훈련들을 계속 해 나가려는 분위기가 교회 안에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목사님께서 교우들을 대상으로 성서학당 프로그램을 하시는 것도 그런 뜻이 있으신 거라 생각하고, 어떤 형태로든 성서학당 프로그램이 해마다 열리면 좋겠다 싶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얼마 전에 발전위원회 해산식을 하면서 남신도회 몇몇 분들과 차를 마시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궁금한 것, 나누고 싶은 신앙적인 주제들이 참 많으시더라구요.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아재들의 신앙 수다’ 정도의 제목으로 성서학당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꼭 아재들, 그러니까 중년남성들만 해야 하냐라고 물으실 수도 있겠는데, 중년 여성, 중년남성, 젊은 그룹 등등등 자신의 현재 상황에 따라서 신앙적인 질문들이 서로 다르더라구요.
하지만, 성경의 배경이나 형식을 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성경을 읽지 못할 리는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읽어 나가면서 각자 나름대로 이해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궁금해하면서 물어보고, 또 설교나 다른 기회들을 통해서 궁금한 것들을 풀어 나가면서 계속 성서와 친해지는 것, 그래서 성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로 매일 매일 조금씩 더 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게 성경 말씀이, 그리고 하나님이 점점 더 내 삶에서 중요해지고 친밀해지는 것이 믿음의 성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과 나와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은 내 삶에 들어올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내 삶의 이야기에 비추어서 읽지 않고 성경을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의 본문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대로 이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이고 25장에서 이어져서 나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 가지 비유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런 비유적인 이야기는 다양한 차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이야기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훈이나 윤리적인 지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상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가 아니라 이와 같다, 이러하다에 가까운 이야기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제일 먼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서로 다르게 받은 달란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달란트의 차이를 받는 재능이나 자원의 차이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크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이해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 중 하나가 서로 비교해서 크다 작다, 높다 낮다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해를 교회에 가지고 들어와서는 사람들을 비교하고 나누는 데 사용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기준, 하나님의 기준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11:11절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으나, 저는 천국은 크고 작음이 없음을 이렇게 말씀하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기준에서는 세례 요한이 위대한 사람이지만, 천국은 그런 구분이나 비교가 없는 곳이지요. 그러니 가장 작은 자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크다 작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천국은 그런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이 세상에 올 때, 우리에게 주어진, 혹은 살면서 얻게 된 고유한 특성들이 있습니다. 남자 여자, 크고 작고, 학력이 많고 적고 등등등이지요.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이것들에 따른 차별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다면, 각자가 가진 이런 특성들은 그 자체로 더 좋거나 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마치 장미꽃과 동백꽃 중에서 어느 꽃이 더 좋은 것이냐라고 묻는 것이 의미 없는 것과 같지요.
우리는 다섯 달란트가 더 많고 좋은 것, 두 달란트가 더 적고 미약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본문을 보십시오. 주인은 두 사람 모두에게 완전히 똑같은 말로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달란트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좋은 업적이나 성취, 재산이나 학력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남겼다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가지고 얼만 기쁘게 감사하면서 살았는가 혹은 살고 있는가라는 의미로 새기는 것이 더 온당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전모는 오직 하나님과 나만 아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런저런 간증을 많이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성취를 드러내는 것이 간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간증은 그런 세상적인 자랑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안에서 겪는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평화의 고백이 아닐까요. 하지만 슬프게도 얼마나 많은 간증이 자기 자랑이나 과시로 변질되고 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와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참 어려운 질문이지만,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그 차이가 두 사람은 긍정적인 것, 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춘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부정적인 것, 할 수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야기에 사용된 표현들을 살펴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그와 같이 하여’ 이득을 남겼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보소서’라고 자신의 삶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자신이 받은 것을 ‘숨겨 두었습니다’라고 하지요. 게다가 그는 그렇게 한 이유를 주인이 굳은 사람이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치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이라 그렇게 하였다고 핑계를 댑니다. ‘늬 탓’이라는 거지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내게 이 이야기는 어떻게 와 닿습니까. 내 삶의 어떤 부분을 건드립니까. 저에게는 ‘이 이야기가 매일매일 더 기쁘게, 더 하나님께 집중해서 삶을 살아야겠다‘라고 읽힙니다. 훨씬 젊었을 때는 전혀 다르게 읽혔고, 지금보다 나이가 들면 또 새롭게 읽히겠지요. 그것이 또한 성경의 놀라운 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도 매일매일, 오늘 여기에서 내게 와 닿는 성서의 이야기를 날마다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