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여행 1) 슬로길 1코스 ~ 5코스
서편제의 고장 청산도를 가다.
90년대 초 우리 것에 대한 막연한 갈증을 겪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을 중심으로 우리말 쓰기가 번져나갔고 내가 속해있던 대학방송에서도 판소리나 사물놀이 같은 우리 음악과 공연에 대해 관심이 깊어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즈음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판소리를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거장 임권택감독의 작품이었다. '서편제'라는 영화였다.
영화가 개봉하는 날, 친구와 함께 종로 3가 단성사에 갔다. 큰 기대를 가지고 가지는 않았다. 대학 방송국의 친한 친구가 국악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어서 우리 음악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영화 속 판소리 이야기가 크게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독특한 소재였기 때문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었다. 개봉 당일 역시나 관객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별 기대없이 본 그 영화 '서편제'는 내 인생 영화로 손꼽을 만큼 대단한 영화였다. 특히, 노란 유채꽃이 핀 굽이진 돌담길에서 송화(오정해)와 유봉(김명곤), 동호(김규철)가 만들어 낸 진도아리랑 가락은 영화 최고의 백미였다.
영화는 영화제 수상과 입소문으로 기록적인 관객을 동원했고 진도아리랑 가락과 함께 이어진 유채꽃 가득한 돌담길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몇 년이 흐르고 영화 속 돌담길이 청산도라는 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완도로 발령을 받고서야 청산도가 완도군에 속해있는 도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완도에 머무르는 주말, 첫 번째 여행지로 서편제의 고장 청산도로 떠난다.
청산도행 여객선, 퀸청산.
오전 7시 청산도행 첫 배로 완도항을 출발했다. 청산도를 느리게 즐기기 위해 도보여행을 선택했다. 청산도에는 슬로길이라는 11개 코스로 구성된 트랙킹길이 있다. 슬로길은 약 42km로 바닷길, 마을길, 산길이 이어지는 도보 여행길이다. 오늘은 첫 배를 타고 들어가서 5시 30분 마지막 배로 완도로 돌아올 생각이다. 청산도 도보여행은 이런 식으로 두 번에 나누어 진행할 계획이다. 더불어, 먼 남쪽 바다 청산도는 맑은 날 밤하늘에서 은하수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맑은 날을 골라 청산도의 밤하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계획이다.
오전 7시 청산도행 여객선이 출발한다. 흐린 날씨로 구름 뒤 아침 태양이 늦은 일출을 시작한다. 아침 해를 뒤로 하고 퀸 청산호가 완도항을 출발한다. 배 물살과 함께 완도항이 점점 멀어진다. 먼바다에서도 완도항은 금방 찾을 수 있다. 완도항 언덕 위에 자리한 완도전망대가 완도의 등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완도의 표지목이 완도전망대라면 완도 동편섬 신지도는 풍력 발전기가 있다. 완도의 동편 신지대교에서 시작되는 신지도는 완도항을 지켜주는 방파제처럼 길게 이어져 풍력발전 바람개비가 있는 곳에서 바다와 만난다. 신지도에서 작은 해역을 지나 보이는 섬이 매일 생일인 섬, 다시마가 유명한 섬 생일도이다. 동쪽 바다를 바라보다 객실 반대편으로 오면 서쪽 바다를 볼 수 있다. 서쪽 바다에는 윤선도의 유배지로 유명한 보길도와 노화도, 소안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소안도와 완도 사이에 보이는 육지는 아마도 해남의 땅끝이리라. 마지막으로 배의 항해실이 위치한 선수로 이동하면 남쪽바다 청산도가 보인다. 이렇게 완도는 많은 섬들의 병풍 같은 호위를 받으며 남도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다.
청산도항 / 서편제 촬영지 (슬로길 1코스)
완도항을 출발한 지 50분 만에 청산도항에 도착한다. 안내소에서 여행안내서를 집어 들고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아 나선다. '해녀식당'이라는 간판 아래 평상에서 섬 아낙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벼운 식사를 위해 백반을 주문하고 메뉴를 쳐다보다 '김국'이라는 메뉴를 발견했다. 뒤늦은 후회이지만 '저걸 주문할걸!!!'이라는 생각과 함께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해남 출신의 내 어머니는 가끔 김국을 상에 올리셨다. 여름에는 시원한 물에 구운 김을 부수어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해 주셨고, 겨울 김국은 비슷하지만 따뜻하게 데운 김국이었다. 단순하지만 맛있고 깔끔한 음식이었다. 식당의 메뉴에 김국이 올려져 있는 것은 오늘 청산도의 이 식당이 처음이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청산도의 김국은 생김을 사용한다고 한다.)
김국을 맛보지 못 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장국에 소박한 반찬의 백반을 먹고 있는데 식당 앞 평상에 앉은 아낙들의 사투리가 내 주위를 끌어당긴다. 전라도 사투리가 섞이기는 했지만 전혀 전라도 사투리 같지 않은 말투였다. 전라도 사투리가 섞인 제주의 말이다. 청산도는 제주와 가까워서 많은 제주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산다고 들었다. 특히, 제주의 처녀들이 청산의 총각들과 혼인하여 터를 잡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고 들었는데 그런 경우가 아닐까라는 상상을 찬 삼아 아침식사를 마쳤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여행길을 나선다. 완도항길을 거쳐 도락리의 데크길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서편제 촬영지를 만나게 된다. 청산도를 홍보하는 대부분의 사진에는 5월 유채꽃이 가득한 봄의 모습이지만, 오늘은 분홍색, 흰색, 진홍색의 가을 코스코스 가득한 가을 청산의 모습이 아름답다. 코스코스 가득한 꽃밭사이로 일렁이는 청산 바다는 유독 더웠던 올해 여름도 이제 지나가고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듯하다. 바다를 뒤로 하고 돌아서면 가을 코스모스 사이로 굽이굽이 돌담길이 이어진다. 작은 돌들이 촘촘히 올려진 돌담은 작은 잎의 초록 덩굴과 포개져 자연이 만들어 낸 길인 양 하다. 돌담사이 작은 스피커에서 영화 서편제의 진도아리랑이 흘러나온다. 첫 배를 타고 온 탓인지 코스모스 돌담길에는 여행객이 나 혼자뿐이다. 구성진 진도아리랑 가락에 돌담길을 걷던 내 무릎은 어느새 가벼워지고 나도 모르게 어깨는 들썩이기 시작한다. 혼자임에도 부끄러워 제대로 된 춤사위는 만들어내지 못하고 반푼이인 양 어설픈 들썩임 뿐이지만 영화 속 송화가 된 양, 유봉이 된 양, 흥에 젖어 굽이굽이 돌담길을 지난다.
화랑포길 ~ 당리길 (슬로길 1코스 ~ 슬로길 2코스)
서편제 촬영지를 지나 화랑포 가는 길은 급하지 않은 경사의 돌담길에 가을 야생화가 여럿이다. 특히 돌담길 가에 피어난 꽃무릇이 검은 나비들을 불러 모아 여행자의 걸음을 붙잡는다. 발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은 시간 속에서 길 따라 늘어선 붉은 꽃무릇과 검은 나비들의 춤사위는 순간의 몽환에 빠져들게 한다. 잠깐의 꿈속에서 벗어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화랑포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서는 푸른 녹음과 허연 속살 같은 기암괴석이 만들어낸 화랑포의 절경과 함께 바다 위 작은 통통배로 시선이 이어지고 통통배 끝자락에 흐릿하지만 여서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전망대를 지나 화랑포길을 돌아서면 권덕리 해변과 말탄바위, 범바위를 마주하게 된다. 슬로길 1코스 화랑포길 끝자락에서는 권덕리길을 바라보며 걷게 되고, 반대로 슬로길 4길과 5길 권덕리 낭길과 말탄바위 길에서는 화랑포를 마주하며 걷게 된다.
화랑포길을 끝으로 슬로길 1코스가 끝나고 사랑길이라고 불리는 2코스가 시작되는데 길이 좁고 험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남녀가 서로 의지하며 길을 가다 사랑을 꽃피울 수 있다는 설명이었지만, 사랑을 꽃피우기에는 벌레가 많아서 곤란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랑이 논 / 해초 샌드위치 / 돌담마을 읍리 (슬로길 3코스)
2코스의 바닷길을 벗어나 3코스에 들어선다. 3코스는 논과 마을을 지나는 평지길이다. 한반도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청산도의 논은 이미 벼들이 색깔을 바꾸고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지 오래다. 노랗게 변한 논들을 지나 굽이굽이 언덕길을 지나다가 뒤를 돌아보니 말로만 듣던 다랭이 논이 눈에 들어온다. 산악지역에서 나타나는 계단식 논의 형태인 다랭이논은 산이 많은 척박한 청산도에서도 생존을 위해 여러 곳에 만들어져 농사지어지고 있다고 한다. 다랭이논 뿐만 아니고 돌이 많은 청산도는 돌과 진흙을 이용한 구들장논도 많다고 하는데 이 지역은 구들장논의 특성보다는 다랭이논의 형태를 띠고 있어 보인다. (다랭이논과 구들장논은 5코스와 6코스에 집중된다고 한다.)
슬로길이라 하여 마음을 내려놓고 느리게 걸었더니 좀 출출해지고 무엇보다도 커피가 필요했다. 습관처럼 마셔온 아침커피를 오늘 건너뛰었더니 속에서 카페인 부족이라는 알람이 울리는 듯하다. 서편제 촬영지 인근 카페를 찾아들어간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특이하게 해초 샌드위치이다. 샌드위치와 해초가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청산도에 걸맞는 음식인 것 같아 주문했다. 톳과 김, 다시마 등 다섯 가지 해초를 작게 채썰어 달걀 옷을 입히고 채소를 곁들여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아주 별스럽거나 맛있는 샌드위치는 아니지만 식감이 독특해서 먹을만하다.
내가 들어간 카페는 테이블이 4개 정도 있는 작은 규모였고 그 시간 손님이 혼자였던 덕에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카페 주인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청산도에 들어와 카페를 차린 지 5년이 되었다는 주인은 청산도의 시기별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청산도 최대 축제가 열리는 4월 중순은 유채꽃이 활짝 피어 청산도에 관광객이 가장 많이 오는 시기라고 한다. 4월도 아름다운 시기이지만 주인이 추천하는 청산도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3월 말부터 4월 초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유채꽃은 꽃망울을 만들기 시작하고 청산도 곳곳에 벚꽃이 만개한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청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가 야생화인데 이 시기 청산도 곳곳은 야생화로 가득하다고 한다. 그래서 관광객이 많은 4월 중순보다는 3월말 4월초에 청산도에 들어오면 가장 아름다운 청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9월에는 코스모스 핀 청산을 볼 수 있고, 청산의 단풍을 보고 싶다면 11월 중순에 와야 한다고 한다. 청산은 워낙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11월은 되어야 단풍이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9월말 오늘 코스모스 핀 청산을 마주했으니 두번째 청산여행은 11월의 단풍이 준비되면 청산행을 준비해야겠다.
주인아주머니의 두번째 이야기는 청산의 절경으로 유명한 범바위 이야기이다. 범바위는 모양에서 호랑이의 머리와 다리, 꼬리로 구분할 수는 있지만 조금 억지스럽다고 한다. 실제로 범바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유래는 남해의 바다 바람이 범바위로 불어오면 해풍과 바위가 만들어내는 소리가 호랑이의 울음소리 같다고 하여 범바위라고 한단다. 범바위를 바라보며 범의 머리쪽(동쪽)으로는 맑은 날이면 제주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꼬리쪽(서쪽)으로는 소모도와 추자도가 보인다고 한다. 비가 내려 대기의 먼지가 깨끗이 가신 다음날이면 범바위에서 제주도와 추자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당리를 지나 돌담으로 가득한 부락에 도착한다. 청산도의 읍리라는 곳이다. 읍리는 평범한 집들이 모여 있고 집들 사이에는 작은 밭이 위치한 지극히 평범한 마을이다. 하지만, 이 평범한 마을을 전혀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돌담이다. 청산도를 여행하다 보면 슬로길을 따라, 마을길을 따라 작은 돌을 층층이 쌓아 만든 돌담길을 쉽게 보게 된다. 읍리의 마을길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돌담길이다. 집과 집의 경계도, 집도 마을길의 경계도, 밭과 길의 경계도 돌담이다. 돌담은 덩굴과 한 몸이 되어 굽이진다. 읍리는 어떻게 보면 이국적인 마을이다. 쓰레기 하나 찾을 수 없고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와 어울린 돌담길은 일본의 작은 마을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일본보다는 제주의 작은 마을 같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돌담은 아마도 거센 바다 바람을 견뎌야 하는 제주나 일본의 바닷가 작은 마을의 공통된 특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신선이 나올 듯 한 낭길과 말탄바위(슬로길 4길~5길)
읍리를 거쳐 낭리(낭떠러지 길)로 이름 붙여진 슬로길 4길이 이어진다. 가파른 낭떠러지를 따라 우거진 수풀길이 이어지며 좁다란 길이 계속된다. 낭떠러지의 좁은 산길을 걷다 보면 길과 낭떠러지, 육지와 바다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가 있다. 특히, 숲길에는 나비가 많아서 노랑색 작은 나비와 커다란 검은색 나비가 번갈아 날갯짓을 할 때면 신비한 느낌에 빠지기도 한다. 청산도는 청산이라는 이름 외에도 신선도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남쪽 끝에 자리한 섬의 위치와 내가 느낀 이런 모습 때문에 옛사람들도 신선도라는 별칭으로 불렀을 것이리라.
낭리를 지나 헉헉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슬로길 5길의 말탄바위에 올라섰다. 오전에 지나온 화랑포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고 맑아진 날씨 탓인지 여서도가 오전보다 더 가깝게 느껴진다. 뒤편으로는 오늘의 목적지인 범바위가 올려다 보인다. 말탄바위를 지나 범바위를 향했지만 이내 길을 포기하고 슬로길 5길의 시점인 권덕마을로 돌아온다. 범바위 가는 길이 험하고 수풀이 허벅지까지 자라있어 시야가 확보되지 않고, 반바지를 입은 나로서는 엄두를 내기가 힘들어 온 길을 돌아가야만 했다.
권덕리 마을에서 택시를 타고 청산리 항으로 돌아온다. 택시 기사분의 추천을 받아 전복해초 비빔밤에 완도 막걸리로 청산을 다시 한번 느끼며 청산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완도로 가는 노을길 with 주앙 질베르토
오랜만의 트래킹으로 몸은 녹초가 되었고 반주로 들이킨 막걸리 한 잔에 눈은 흐릿해진다. 여객선 객실에 앉아 눈을 감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천근만근 몸을 일으켜 뱃전으로 나간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노을이 지고 있다. 노화도와 완도사이 서쪽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난간에 기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노을을 바라본다. 완도로 돌아가는 노을길을 함께한 음악은 주앙 질베르토의 보사노바이다. 요즘 저녁나절 즐겨 듣는 음악인데 노을을 보자마자 이어폰을 찾아 귀에 꽂았다. 보사노바가 흐르는 노을 지는 저녁, 이 순간의 주인공은 작은 배 한 척이다. 흐린 구름사이 검붉은 태양빛이 연극무대의 조명처럼 한줄기 조명을 비추고 붉은 조명아래에는 의자에 앉아 보사노바를 만들어내는 음악가처럼 배 한 척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다. 나는 난간에 기대어, 보사노바와 노을에 기대어 청산의 하루를 마감한다. 어느새 여객선은 완도항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