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행은 스리랑카에 갈 작정이었다. 거실에 앉아 비행기 티켓을 검색하고 있는데 2월에 제대한 아들 녀석이 어슬렁 어슬렁 다가와 등너머를 어른거린다. “아빠! 이번에는 어디로 가요?” 매년 여름휴가에 여행을 하는 것을 알고 있는 녀석이 흥미를 보인다. “너 제대도 했는데 같이 갈래? 스리랑카에 가려고 하는데…“ 고생을 사서 하는 평소 내 여행 스타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2월 말 제대하여 3월 초 복학한 상황에서 여행이라는 해방구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제대 기념 삼아 같이 여행을 가고 싶다는 녀석은 스리랑카보다는 몽골을 가고 싶다고 했다. ”아빠, 초원이나 사막도 보고 싶고 밤하늘에 가득 찬 별도 보고 싶어요. “ 이렇게 해서 올해 내 여행지는 인도양 스리랑카가 아닌, 몽골의 초원과 사막으로 정해졌다.
10여년전 베트남 호치민과 2025년 몽골의 사막에서
아들 녀석과 둘만의 여행은 10여 년만이다. 녀석이 초등학교 시절 우리는 베트남 호치민과 무이네 그리고 녀석이 소망했던 홍콩의 디즈니를 여행했다. 철없던 소년이었던 녀석은 군복무를 마치고 이제 취업을 고민하는 대학 3학년 복학생이 되었다. 10대의 어린 초등학생이건, 20대 청년이 된 아들이건, 아들과의 여행은 아버지에게는 큰 의미이다. 몽골 테를지 국립공원 아리야발사원에서 만난 60대 아저씨는 “아들이랑 둘이 여행을 왔나 보네요. 아들과 둘만의 여행이 참 쉽지 않은데… 그냥 보기 좋고 부러워서 말 걸어봤어요. 불편했다면 미안합니다. 허허…”라고 말하며 사진을 한 장 찍어주었다.
사원에서 만난 분의 느낌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그렇듯 아들 녀석과 내 관계도 애틋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서로 간의 접촉면이 적어진다. 나름 아이와 대화를 나누려 노력하지만 상투적인 대화에 그치곤 한다. 그래서 아들 녀석과 함께하는 여행은 아버지에게 특별한 순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에게도 이번 여행은 특별하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는 생각보다는 오랜만에 둘만의 공간을 공유하고 한 곳을 바라보며 감동을 함께 하고 싶었다. 아들 녀석과 둘만의 추억을 공유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그런 여행인 것이다. 지나가는 부자를 보며 보기 좋고 부러워 말을 걸어보고 싶을 만큼…
몽골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
몽골여행을 계획하며 머릿속에 가득했던 것은 초원이나 사막의 밤 그리고 하늘을 가득 채운 별과 은하수의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몽골에 도착해서 우리가 도착한 시기처럼 달이 밝으면 별을 보기 쉽지 않고 그래서 하늘이 어두운 그믐의 몽골행 비행기 가격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보다는 훨씬 더 많은 별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현지 여행사 가이드가 별이 가장 많이 보인다고 알려준 시간인 새벽 3시에 매일 일어나 게르밖으로 나가 별빛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흐린 날씨 때문에 별은 커녕 달구경도 힘들었고 초원의 마지막 날에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에 게르가 침수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신세였다.
초원은 어디에나 말과 양 그리고 소와 낙타를 볼 수 있다.
별을 잔뜩 기대하고 몽골을 여행한 우리는 흐린 날씨에 조금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밤하늘 별 외에도 몽골의 사막과 초원에는 우리를 감동케 하는 여러 가지 보물들이 가득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지평선까지 펼쳐진 푸른 초원, 초원을 점령한 양, 소, 낙타, 염소, 말 등의 동물들(아마도 우리가 본 사람의 수보다 동물들의 수가 몇 배는 많았으리라…) 길을 건너는 사람들을 위해 차를 멈추는 것이 아니고 양과 소, 말의 횡단 때문에 자동차가 속도를 줄이고 멈춰 서야 하는 순간, 초원과 사막의 비포장도로를 네비게이션도 없이 달리는 푸르공들의 모습, 말과 한 덩어리가 되어 오토바이를 타며 초원을 달리는 목동들, 칭기즈칸의 땅과 후예라는 것을 증명하는 양 펼쳐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내가 이번 여행 중 가장 사랑하게 된 순간이 바로 이 시간이었다. 현지 여행사에 신청한 투어가 시작되는 날, 같이 떠날 6명의 투어팀과 함께 미니사막(Elsen Tasarkahai)의 게르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우리는 2~3시간 정도 자유시간을 갖었다. 몽골의 초원과 사막의 7월 날씨는 낮에는 30도 내외를 오가는 찌는 듯한 날씨이고 새벽에는 이불이나 침낭이 필요한 쌀쌀한 날씨이다. 한낮에 도착해서 게르 안은 찜통이었다. 대충 짐을 정리하고 더위에 지쳐 게르 밖 작은 그늘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한국의 여름처럼 습하지 않고 건조한 날씨인지라 그늘에 앉아 있으면 바람이 살랑거려 짐정리에 비 오듯 쏟아지던 땀도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아 다운받은 노래 몇 곡을 틀어놓고 사막과 초원 그리고 드높은 하늘이 펼쳐진 Camp밖 풍경을 바라보며 앉았다. 1시간여를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풍경에 취해 시간을 보냈다. 망중한을 즐기는 내내 단 한 사람도 지나가지 않았고 차도, 동물도 보이지 않았다. 나와 풍경 그리고 Beatles, John mayer, 잔나비가 함께한 시간이었다. 아무 행동도,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시간의 흐름도 인식할 필요가 없는 시간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완전한 평화의 순간이며, 순수한 시간이었다. 낙타도 타고 트레킹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즐겼고 가슴이 뻥 뚫리는 초원의 도로를 달려보았지만 이 순간이 몽골여행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많이 친해진 가이드 뚜까씨에게 다시 몽골에 온다면 차를 타고 여러 곳을 둘러보는 여행이 아닌 초원이나 사막의 게르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며 그늘에 앉아 시간과 풍경을 즐기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다. 다시 한번 온전한 평온의 순간을 맞고 싶다.
유목민의 집에서 여행자의 집이 된 몽골의 집 게르
몽골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몽골의 상징 칭기스칸과 유목민의 집 게르가 아닐까 생각한다. 자동차를 타고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을 달리며 수 없이 많은 동물들과 목동들을 본다. 그리고 중간중간 둥근 모양의 흰색 천막촌들 유목민의 집 게르가 보인다.
둥근 원통형 벽을 가졌고 원뿔의 지붕으로 구성된 단순한 모양의 외형이다. 내가 본 모든 게르는 같은 색깔, 같은 외양을 가졌다. 내부의 바닥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 나무바닥으로 만들어 진 곳도 있었지만 실제 유목민의 집에 가까운 것은 흙바닥이 아닐까 싶다. 내부 벽면은 등 간격으로 나무 기둥이 서 있고 둥근 원통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얇은 나무들이 격자형태로 벽면을 구성하고 있다. 지붕은 원뿔 형태로 나무 기둥이 꼭짓점을 향해 모아지며 구조적 안정을 만들고 있다.
게르의 내부에는 4개의 침대가 있고 의자와 작은 테이블이 있다. 전기시설은 단순한다. 1-2구의 콘센트와 전등이 전기시설의 전부이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지만 한 낮이 아니면 더위가 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새벽에는 이불이나 침낭이 필요했다. 첫날 가이드가 준비한 침낭을 외면했던 여행자들은 다음날부터 침낭을 요청했고 비가 온 마지막 날은 게르에 난로를 피우고 자야 할 만큼 7월 몽골의 새벽은 쌀쌀했다.
게르뿐 아니라 도심지의 숙소나 카페에도 에어컨을 보기는 힘들었지만 난방시설은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게르에는 화목난로가 준비되어 있었고 난로는 환기를 위해 연통이 게르 중간 원뿔모양 천정을 통해 외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투어 마지막 날, 난로를 피워주겠다는 게르 관리인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일산화탄소 중독이 걱정되서 였다. 꽉 막힌 공간에서 난로를 피우다가 연통 연결부위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꼼짝없이 타국에서 저 세상행이 될 것 같은 노파심에 거절했다. 어린 시절 수 없이 봐왔고 실제 경험도 있었던 연탄가스 중독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궁금증이 번져 우리 투어의 운전기사 Mr 바에게 혹시 게르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사고가 생기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심심치 않게 게르에서 사고가 생긴다고 한다. 역시… 좀 춥게 자긴 했지만…
게르외에도 몽골에는 내가 찾은 독특한 건축구조가 또 하나 있다. 처음 울란바토르에 도착해 구글맵을 통해 몽골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찾는데 유명한 식당임에도 불구하고 큰 창이 있다거나 외부에서 보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구조의 식당이 아니었다. 작은 간판이 있는 문을 열면 긴 복도나 계단을 지나야 커다란 홀을 만나게 되는 구조였다. 이런 구조의 건물이라면 한국에서는 절대로 식당으로 임대를 하지는 않을 것 같은 구조였다.
처음에는 90년대 초까지 공산국가였던 몽골이 홍보나 광고 개념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투어 중 내 엉뚱한 상상에서 비롯된 질문에 가이드인 뚜까씨는 황당해 하며 그런 이유가 아니고 몽골의 겨울이 워낙 춥기 때문에 난방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그런 구조를 가진 식당이 많다고 알려준다. 최근에 오픈한 서양식 식당은 우리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난방에 신경을 쓰는 몽골식 식당들은 대부분 통창이 없고 출입문을 통과해서 복도나 계단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식당 홀이 나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게르와 마찬가지로 여름보다 겨울 추위가 대단한 몽골의 기후영향을 받은 건축구조인 것이다.
몽골의 겨울 추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겨울 몽골이 궁금해진다. 뚜까씨의 설명에 따르면 몽골의 겨울 기온은 영하 40도까지 떨어지지만 여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절경을 가지고 있고 겨울풍경과 얼음낚시를 즐길 수 있으니 몽골의 겨울도 경험해 보라고 한다. 고혈압이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하얗게 변한 몽골의 설경도 초록의 초원만큼이나 아름다울 것이라 상상해 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