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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Dec 09. 2022

역경과 고난 끼워넣기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직장생활

내가 이 직장에서 일을 시작한 지 벌써 3년이나 되었다. '실속이 없다.' '직무에 비해서 너무 오버스펙이다.'라는 평을 듣고 있긴 하지만, 나는 개인적이고 내 할 일만 제대로 하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적당히 싫은 소리 다 해가면서 일할수 있는 지금 직장이 좋다.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쫄쫄 굶으면서 생활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그럭저럭 지낼만하다.


대부분의 정규직 직원들은 3년에 한 번씩 재계약을 한다. 나도 이번에 재계약 서류를 제출했다. 전자결재로 간편하게 결재를 올려버렸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한 번 재계약을 하고 나면 이제 나는 학위를 병행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학교를 더 다니고 싶지 않았다. 돈을 못 버는 학생 생활은 더 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미 초중고 대학교까지 18년의 시간을 학교를 다니면서 학교에서 좋은 기억보단 나쁜 기억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인생에서 공부 말고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최저의 비용으로 할 수 있는 건 공부뿐이어서 공부를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가난하기 그지없었던 나는 어서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그랬던 내가 일을 하다 보니 학위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회사는 논문 쓰는 걸 장려하니까, 학위 병행하면서 논문 내면 좋지 않을까? 지금 내 자리는 기술직이라 승진도 한정적이고, 이직도 한정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회사의 환경에서 쌓아 올릴 수 있는 최고의 스펙은 학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년퇴임이 10년 채 남지 않은 상사도 내가 본인 자리를 이어줬으면 하는 은근한 기대감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나락까지 내려갔던 나를 나는 잘 알기 때문에, 혹여 학위를 하다가 내가 더 우울해질까 봐 걱정되었다. 왜 소년이 죄를 지으면 소년원에 가고 대학생이 죄를 지으면 대학원에 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내가 과연 타당한 결과를 얻어서 무언가 주장하는 글을 쓰고 발표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긴가민가해하는 나를 위해서 상사와 함께 올해 논문을 한 편 준비했다. 간단한 데이터를 정리해서 통계를 내고, 내가 주장하는 바를 내세우는 논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 깔끔한 글을 쓴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비유와 은유를 최대한 걷어내고, 직관적이며 명확하게 글을 써야만 했고, 내 논문에 의구심을 갖는 리뷰어들에게 나의 주장을 관철해야 했다. 그 결과 논문은 SCI급 학술지에 올라갔다.


이 과정들이 재미가 있었느냐고 물어본다면, 재미는 없었다. 힘들고, 짜증 났고, 체크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서 신경이 곤두섰다. 내고 나서도 '이걸 누가 찾아보겠어?'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게 몇 달 지나고 듣게 된 세미나에서 나의 논문이 인용되었다. 최근의 한국에서의 데이터라며 연자께선 내 논문을 소개해주셨다. 캡처된 내 논문의 한 페이지를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뛰었다. 이 맛에 다들 이런 걸 하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학위를 밟기로 결정했다. 이걸 가지고도 잘못된 선택을 했네, 좀 더 다른 데로 갔어야 했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일단 하기로 했다.


솔직히 아직도 나는 이게 얼마나 크고 험난한 역경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더 욕심내고 더 과학적인 논문을 쓰려고 하다 보면 더 어렵고 힘들겠지. 지금은 깜깜한 방 안에서 빙산의 일각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대부분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이었고, 나의 환경이 나를 얽매어 왔기 때문에 항상 힘들었다. 그런 내가 스스로 역경과 고난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도 등록금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지출하면서.


실적이 아주 좋다거나, 빛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내 인생에 역경과 고난을 끼워 넣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고 생각하기로 했다. 즐거움과 안락함을 포기한 대신, 조금 더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이 불편함과 자잘한 실패들이 나를 잘 이끌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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