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7할의 삶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모씨 May 03. 2023

월급을 모조리 탕진했다!

돈을 많이 쓰면 더 행복할까?

나에게 돈은 재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물건이다. 돈이 부족해서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일까, 돈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돈을 버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적지 않은 돈을 버는 지금까지도 저축과 절약은 내 몸에 잘 스며들어있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내 인생을 흔들어온 가난이 무서워서 항상 돈을 곁에 두게 되었다. 집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사는 것 치고는 많다고 할 수 있는 월급의 7할을 항상 저축하고 투자했다. 인생에 기회라는 건 통장잔고와 비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매달 가계부를 쓰고, 쓰기 전에 꼬박꼬박 '진짜 필요한 물건, 서비스일까?'를 생각해 보길 수천번, 여느 때처럼 월급이 들어온 주에 하는 생필품 재고조사와 주문을 하기 위해서 선반을 정리하던 도중에 번뜩 생각이 들었다.


'월급, 다 써보자.'


근무를 시작한 지 4년 차, 실무의 중심에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직장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직장 생활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그렇지만 업무환경이라는 게 대체로는 굉장히 통제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적어 사람들은 직장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도 그랬던 걸까 싶다. 마음이 복잡했다. 내 앞에 닥친 이 갈등과 고난, 그리고 역경을 전혀 이겨내고 싶지 않았다. 그럭저럭 넘어가고 싶을 뿐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열심히 살아봤자 우리 엄마아빠 노후 준비 안되어 있다고 남자친구네 부모님은 걱정을 하신다. 남자친구보다 내가 돈을 더 벌고 더 모아도. 나는 도대체 뭘 위해서 일하는 걸까 싶어 돈을 모조리 써보기로 했다. 


돈을 쓰기로 마음먹으면서 결심한 건, '이번에는 나한테 모조리 써보자!'였다. 내 가계부에는 특이한 항목이 있다. 바로 '남들 것' 항목이다. 나는 주변에 챙겨주고 싶은 사람이 별로 없고,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내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에게 최대한 잘해주고 싶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넓게 베풀고 싶었다. 그리고 이 비용이 꽤 큰 비용을 차지했다.


그런 내가 이기적으로, 나한테 써보자고 마음먹은 거다. 


막상 돈을 펑펑 쓰기로 했지만, 여태 살아온 관성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마트 마감할인 상품중에 먹을만한 게 있을까 싶어 들렀다가 미국산 소고기 한 덩이를 천 오백 원에 구매하고 기분 좋게 돌아오던 길이었다. 눈앞에는 새로 개업하는 헬스장 전단이 붙어 있었다. 오픈 기념 기구 필라테스 회당 9,900원이라는 전단이었다. 무슨 귀신이 씌었는지 연락을 했다.


연락을 했더니 100회 수업을 끊으면 9,900원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정확하겐 99만 원 인 것이다. 그래도 듣고 싶었다. 내가 평소에 하는 운동들 말고도 다른 운동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100번 수업을 들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안 쓰던 근육도 쓰고 괜찮지 않을까, 하고 결제를 했다.


내 만족감에 큰돈을 함부로 써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게 맞나 긴가민가한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 때 큰 마음을 먹고 돈을 주고 영화관에서 봤던 영화가 재미가 없어서 집에 와서 펑펑 울었던 적이 있었다. 내 돈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더 많은 돈을 썼지만 그렇게 슬프진 않았다. 운동 잘할 수 있겠지, 건강하게 잘 쌓아나가야지 하는 생각만 들었다.


두 번째로는 오랜만에 비행기표도 끊었다. 남자친구랑 같이 여행을 가보기로 했다. 새로운 풍경 여태 못 봤던 것을 보고 오면 좋을 것 같았다. 생각은 잠시 접고, 공부 생각은 잠시 접고, 실컷 노는 3박 4일을 보내기로 했다. 역시나 옛날만큼 저렴한 가격의 비행기표는 없어서 속이 조금 쓰렸다. 그렇지만 그래도 좋았다. 새로운 풍경을 익숙한 사람과 본다는 정말 행복한 일일 테니까.


많은 돈을 단기간에 써보니 기분이 특출 나게 좋아지진 않았다. 그렇다고 돈이 아까워서 전전긍긍하지도 않았다. 돈과 교환한 서비스와 물품에 대한 만족감보다는, 내가 이렇게 당장 소비를 하더라도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 스스로 버팀목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 큰 것 같다. 티도 안 나고 어쩔 땐 바보 같기도 했지만, 나의 생활습관이 이렇게 나를 지지해주고 있었구나 싶었다.


돈을 쓴 만큼 좋은 것을 얻고, 재밌는 경험을 쌓고 행복한 기억을 또 어딘가에 켜켜이 뉘어놓고 발판을 삼아 조금 더 나은 날들을 만들어야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인공지능에게 삶을 물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