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결혼식 날잡고 장례식장에 가버린 예비신부

by 박모씨

나는 남편의 부모님보다 먼저, 그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뵈었다. 남편은 어린 시절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 대신 늘 곁을 지켜주신 분들이라며, 내가 정성껏 만든 꽃바구니와 귤을 한아름 들고 오래된 주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골목을 따라 들어서자 세월이 묻어나는 대문이 보였고, 그곳이 바로 남편의 추억이 켜켜이 쌓인 집이었다.


거실에 들어서니 벽면마다 손주들의 사진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유치원 시절 귀여운 미소가 담긴 액자, 그리고 그 틈 사이로 하나둘씩 교복을 입은 앳된 증명사진, 어느새 훌쩍 커버린 손주들의 가족사진과 결혼사진까지 쌓여 있었다.

남편은 그 사진들을 구경시켜주다 “내가 처음 자전거를 배운 것도 할아버지 덕분이야.” 라고 했다. 밖에 나가보니 네 발 달린 자전거를 타고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달렸을 마당은 생각보다 아담했고, 지금은 커다란 목단 한 그루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장손인 남편의 할아버지께선 구순이 훌쩍 넘으신 나이셨는데, 매일마다 밥도 세끼 챙겨드시고, 근처에 있는 공원에 산책도 나가신다고 하셨다. 키도 크시고 반듯하게 걸으시는데다 말씀도 또박또박 해주셔서 내심 놀랐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만들 꽃바구니를 참 좋아하셨다. 이런 건 처음본다고 참 예쁘다고, 이만큼 큰건 못받아보셨다고 했다. 처음 뵙는 거니까 예쁘게 봐주시라고 열심히 만들었다고, 저는 남자친구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말씀드렸더니, 본인도 장손이 참 기특하다고 하셨다.


그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아침에 부고 소식을 듣고 집안 식구들에게도 알렸다. 사돈댁네 할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가봐야 할것 같다. 말씀 드렸더니 우리 엄마는

날 잡고 그런데 가는거 아니다.

라고 했다. 예상 못했지만 너무 엄마같은 반응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그러면 엄마 아빠가 다녀오시겠느냐 했더니 그건 또 아니라고 하셨다. 아직 서로 인사도 못했는데 어떻게 가느냐고. 그러니 내가 다녀오겠다고 했다.


묵념을 하면 눈물이 댓자리에 떨어질 것 같아서 절을 두번 올렸다. 두번 째 절에는 원망을 조금 담았다. '손주 결혼하는 것은 보고 가시지....' 상주이신 아버님도 안아드리고, 시어머니도 안아드렸다. 친척분들에게도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처음으로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노환으로 돌아가셔서, 식구들은 전부 마음의 준비를 단단하게 하신 모양이었다. 장례식장에서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린 사람은 나였다.


할아버지를 뵈러 갔더 그날, 할아버지는 종종걸음으로 나랑 남편을 배웅 나와 주셨다. 그리고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남편에게 5만 원을 쥐어주신게 계속 생각이 났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었다. 한 명분의 사랑을 이제 더이상 오롯이 느끼지 못한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그래서 나는 눈물이 계속 났다.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뵌 적이 거의 없다. 할아버지는 뵌 적도 없고, 할머니들은 내가 태어났을 때에도 연세가 많으셨다. 더군다나 엄마 아빠의 학대와 방임에 그들의 사랑도 확인할 수 없는 판에, 그들의 어머니가 주는 사랑은 내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는 것은 이런거구나, 하고 눈물이 흘렀다. 나는 죽고나면 모든게 다 없던 것 처럼 사라질거라 기대하고 죽는걸 내심 기대했었다. 항상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켠에 두고 있었다. 나만 죽길 바랬었나? 나는 우리 가족들이 모두 죽었으면 하고 바랬다. 다들 너무 힘드니까, 모든 족쇄와 고통이 한번에 사라질 날을 기대했었는데, 보통의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흔적과, 사람과, 흩어 없어지지 않는 사랑을 남기고 가는구나 싶었다.


남편은 장례식장에서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여주는 건 참 좋은 일 같아.'


귀신이 붙고 부정을 탄다는 장례식장에서 나는 사랑하는 가족을 한 번 느꼈다. 구순이 넘은 할아버지께선 나에게도 선물을 남겨주시고 가셨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