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맞이하는 봄이다. 벌써 스무 살 초반을 지나가고 있다.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 속에 살고 있다. 코로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2년째 계속되고 있다. 학교를 안 간지도 어느덧 2년째. 마치 칩거 생활하듯 집에서만 지내고 있다. 이런 생활의 좋은 점도 있긴 하다. 주변 사람보다 나 자신을 오롯이 바라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생겼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는 것. 저번 주에 중간고사가 끝났다. 막판 달리기를 너무 한 탓인지 꽤 많이 힘들었다. 잦은 배탈에 진이 다 빠진 적도 여러 번 있고 말이다. 매해 봄은 나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준다. 아직 나에게는 많은 기회가 있다며 ‘다시’라는 단어를 외쳐보자고 하는, 그런 메시지. 나는 옆에 있는 우리 집 고양이 ‘만두’에게 말했다. “나 다시 잘 해낼 수 있겠지?”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내 생각에 잠겼다. 나약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해보자고 외친 게 몇 번째야 도대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다소 큰 결함이 있다. 그리고 정말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따금 깊은 슬픔에 빠진다.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흘러 내 기력까지 모조리 빼앗아간다. 혹시 내 내면 깊숙이 남아있던 상처 때문일까. 아무튼 이 먹구름이 깊어져 그 속에서 계속해서 허우적거릴 때면 다시 밝아올 날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암담하다. 이놈의 말할 수 없는 병이 말썽을 부리기 때문이다. 자기 관리가 중요한 이 병을 달고 산다는 건 쉽지 않다. 티가 잘 안 나는 병이기에 이따금 예민하게 굴면 괜히 남들 보기에 유난 떠는 것만 같다. 게다가 신경 쓸 일이 늘면 남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쉽게 지치곤 한다. 요즘은 안 그렇지만, 예전엔 밤이 되면 약으로 인해 정신이 몽롱해지며 서둘러 잠을 청하러 가는 것도 나를 서글프게 했다. 자연스러운 잠이 사라진 느낌이랄까.
어느덧 나는 매미가 내 귀를 온종일 시끄럽게 울리는, 여름의 계절을 보내고 있다. 그 사이, 사랑이 잠깐 왔다 지나갔다. 친구로 지내자고 끝맺었는데 정말 그게 가능한지는 물음표다. 오늘 아침 어김없이 나는 햇빛샤워를 하러 집 밖을 나섰다. 햇빛샤워, 이건 내가 붙인 이름이다. 햇빛을 많이 받으며 걷다가 문득 들었던 생각인데, 충분한 햇빛 아래 서면 기분이 매우 좋다. 의학적으로는 그 이유가 햇빛을 받게 되면 세로토닌이 분비되어 행복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책길에서 마주하는 오색찬란한 꽃들을 보며 나는 나의 여름꽃을 생각했다. 나는 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여름에도 부단히 힘쓰고 있다. 베이커리 자격증 한 개는 엄마와 함께 공부하며 취득했고 그 기세를 힘입어 또 다른 공부를 시작하려고 한다. 두근두근. 그러면 가을에 옛 어른들이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하시듯 나도 올해 이룬 일들을 뿌듯하게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올여름, 멈춰졌고 부서졌던 내 삶과 마음이 ‘다시’ 이렇게 굴러가고 있다. 그냥 다시 해보자고 말해보는 게 아니다. 누군가 그랬듯 숱하게 겪은 실패로 인한 성공의 오차를 줄여나가자는 것이다. 그 과정 속 배우는 게 차곡차곡 쌓여갈 테고 난 더 성숙하고 단단해져 있을 거다.
도토리처럼 단단해졌을까 싶었는데, 이제 가을이다. 작년 가을에 비해 올해는 꽤 생산적일 뻔했다. 나는 다시 넘어져버렸다. 환절기 동안 내 안에선 무수한 번뇌가 가득했다. 2학기가 개강하면서 비대면 수업으로 진행되었고 줌(zoom:화상으로 하는 수업)으로 수업을 듣고 조별과제 또한 조별로 줌에서 만나 소통했다. 나는 줌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 카톡으로 문자를 주고받는 게 참 어렵다는 것을 새로이 느꼈다. 어느새 난 굉장히 소심한 내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내가 실수할까 봐, 내가 하는 질문이 바보 같은 것일까 봐, 그러한 생각에 조용히 있게 되고 결국 난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요즘 계획을 세우고 이런저런 이유로 피하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들이 늘고 있다. 그렇기에 하나씩 하나씩 ‘오늘의 숙제’를 해야만 함을 느꼈다. 그나저나 밀린 강의들, 과제들이 디데이를 향해 오고 있었다. ‘큰일 났네..’하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때때로 엄마랑 산책을 하는데, 어느 날 엄마는 말씀하셨다. “햇살이 참 따사롭네. 곡식이 잘 익겠는걸.”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따사롭다는 단어가 딱 어울리네요”. 따뜻하다 말고도 따사롭다, 따듯하다(따뜻하다보다 여린 표현-국어사전), 뜨뜻하다 등 우리말 단어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다. 우리가 자연을 대자연이라고 했던가. 자연의 섭리 속에 사는 우리는 한없이 작은 존재일 뿐인데 왜 이리 억지로, 무리해서 살려고 했을까. 그 결과 망가진 건 내 몸 하나일 뿐. 앞으로는 자연을 오롯이 느끼며 그 속에서 건강하게 숨 쉬고 싶다. 누군가가 그랬다. "자연의 일부로 산다는 건 생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나는 자연의 섭리대로 살려고 한다. 죽고 싶지 않다.
다가오는 겨울에는, 친구가 말했던 것처럼 흰 눈이 펼쳐진 넓은 땅을 보고 싶다. 생각만으로도 기대되고 설레지 않는가. 입김이 호호 나오고 후후 불어 붕어빵도 나눠먹고 하는 계절이 오고 있다.
나의 경우 살아가는 데 재미는 로맨스인 거 같다. 중학생 때 화학 시간이었던가 ‘공유결합’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때 공유가 나오는 드라마가 인기였다. 친구랑 배우 공유를 너무 좋아해서 그 수업을 듣다 서로 마주 보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그 친구랑은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유독 비슷해서 그러한 얘기들로 설레곤 했었다. 학교의 낙(樂) 중 하나였고 되돌아보니 그래서 그땐 더 재밌게 학교를 다녔지 않았나 싶다. 요즘에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저 짝사랑만으로도 마음이 충분히 행복하다. 연락하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나는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기 때문에 사랑에 목매고 싶지 않다. 내 하루가 혼자서도 잘 굴러갈 때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의 짐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직은 내가 너무 미성숙하고 불안정하단 걸 안다.
내 이름은 차가운 듯해 보이는 ‘영하’라는 이름이었다. 내 사주에는 따뜻한 기운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가. 아무튼 그래서 영하의 하는 한자로 ‘여름 하’다. 그럼에도 대학에 와서 잦은 아픔으로 우리 엄마의 권유대로 난 따뜻한 느낌을 주는 이름으로 개명을 했다. 차가워지기 쉬운 나에게는 따스한 햇빛, 따뜻한 엄마의 품, 따뜻한 물 한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언제나 필요하다. 때론 춥고 외로운 이 세상에서 꽃들은 다가올 봄을 다시 준비하고 있다.
덧붙여, 나는 내 옛 이름을 이렇게 수정하고 싶다. 꽃 영(英)에 여름 하(夏). 그러니까 "차가운 계절에 태어난 나! 여름의 꽃을 '다시'를 반복하다 언젠가 피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