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이야기
인생에 거의 없었지만, 가장 존재감이 강했던 아빠와 나의 이야기이다. 어린 나에게 아빠는 두려움의 존재였다. 아빠는 공장에서 자주 다쳐 붕대를 감고 집에서 누워 있었는데, 나는 엄마가 오는 시간, 어스름한 저녁이 될 때까지 1층 계단 앞에서 나뭇가지들로 개미집을 파곤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현경이 왜 집에 안 가니? 밥 먹어야지!” 우리 집의 사정을 잘 알고 나를 들여보내면 나는 그냥 배시시 웃으며 들어가는 척하다가는 다시 나와 쭈그려 앉아 엄마를 기다렸다. 또각또각 구두에 이쁘게 차려입은 엄마는 보험회사 팀장이었고, 엄마가 이쁠수록, 엄마가 돈을 벌수록, 아빠와 엄마도 더 자주 살림을 부수고 싸웠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날, 엄마는 아빠를 피해 도망가고, 아빠는 맨발로 엄마를 찾아다녔다. 그 시절, 그 동네에서는 어느 집이나 흔히 있는 일이었다. 엄마가 도망가면 아빠는 어린 언니와 나에게 라면을 끓여오라거나, 여러 가지 심부름을 시켰는데,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면 굉장히 화를 냈다. 티브이를 보고 있어도 언니와 놀고 있어도 늘 나의 온 신경은 아빠에게 쏠렸다. 아빠의 눈빛 하나, 입술의 일그러짐 하나하나 나는 다 체크했고, 특히 아빠가 기분이 좋아 흥분한 날은 더 조심했다.
동네 친구들과 저녁까지 숨바꼭질, 술래잡기, 땅따먹기를 하며 엄마 아빠를 기다리던 날이었다. 나는 계단과 계단 사이에 술래의 눈을 피해 숨을 죽이며 숨어있었다. 그때, 누군가 1층으로 올라왔고 들켰구나, 싶어 자포자기할 때, 아빠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기쁜 마음에, 아빠!!! 하고 부르며 달려갔다. 아빠는 그런 나를 제지하며 크게 화를 냈다. “김현경! 정신 차려!! 애가 정신을 차리며 살아야지” 하며 나를 다그쳤다. 어렸던 나는 민망함과 두려움에 고개를 숙였다. 아빠는 다시 한번
주의를 주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엄마 아빠는 크게 싸웠다. 나 때문에 싸운 것 같아 밤새 자책했다.
나는 아빠를 웃게 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친척집에 가면 나보다 1살 어린 현진이를 보고 아빠는 자주 웃곤 했다. 나는 현진이가 우리 집에 놀러 오면 부탁을 한 개씩 들어주고 아끼는 선물을 주면서 아빠를 한번 안아주고 오라거나, 볼에 뽀뽀를 하고 오라고 시켰다. 아빠에게 현진이 같은 딸이 필요한 것 같았다.
결혼하고 아빠는 모두가 인정해주는 딸바보가 되었는데, 아빠는 그게 원래 아빠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막둥이”라 불리게 되었다. 결혼하고 나서 처음 듣는 “막둥이” 애지중지 고이고이 키운 막내딸이라는 이미지가 나는 견딜 수 없이 오글거리지만, 아빠의 착각을 인정해주기로 했다. 지금의 아빠는 혼자니까.
아픈 엄마를 자주 보러 가던 시절, 아빠는 이미 예전과는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신사적인 장인어른이었고, 깔끔한 성격에 손주들을 곧잘 봐주었다. 엄마 아빠의 집이 편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늘 터질듯한 폭탄처럼 긴장감이 감돌고 집에 있는 유리는 산산조각이 나 있고 벽이나 문이 늘 부서져 있었는데, 이제는 민제 민아를 데리고 가도 안전하고 깨끗한 집이 되어 있었다. 나는 사랑받는 딸이 되었다. 어느 날 친정에 갔다가 아빠가 아끼던 많은 양주 중 한 병을 달라고
아빠에게 졸랐다. 우리 집에도 양주 한 병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빠는 네가 양주가 뭐가 필요하냐며 아빠가 아끼는 거라 안된다고 말했고, 나도 사실 한번 해본 말이었기에 잊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고 며칠 후 엄마의 전화가 왔다. 내가 양주 달라고 했던 날 아빠가 크게 화를 냈었다는 것이다. “쟤는 양주 한병 사오지도 않으면서 그걸 달라고 하냐, 참 이상한 애라고, 그리고 사모라는 애가 왜 술을 달라고 하냐”면서 오래 투덜거렸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전달한 엄마도 그때는 미웠다.
나는 울음을 들키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그날 엉엉 울면서 언니에게 전화했다. 순간 착각했다고. 내가 사랑받고 자란 딸이라고 착각했던 내가 너무 밉다고, 왜 평생 겪었으면서 잊었을까, 내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온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평생 가지지 못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아빠의 존재는 내가 앞으로도 가지지 못할 일이다. 지금의 나는 거절당할 일을 아예 만들지 않는다. 쉬이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거절당했을 때에 아직 마음속에 어린 나는 부끄러움을 감당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