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가는 길
오랜만에 배낭을 짊어지고 학교 앞 공원을 지나 언덕배기 위에 있는 중앙도서관으로 향한다. 시간 강사 계약 종료와 함께 무용지물이 된 ID카드 때문에 도서관 안에서 찔금 찔금 읽던 책들을 박사후 과정 친구의 대출 카드를 빌려 욕심스레 빈 배낭에 꾸역꾸역 챙겨 나올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사뭇 경쾌하다.
새 인생을 찾겠다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결혼과 함께 뉴질랜드 이민을 감행했다. 대졸 경력자에게 다소 수월했던 뉴질랜드 이민법이 매력적이었고, 수리통계를 전공한 천상 이과생 출신이었지만 영화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했던 내게는 뉴질랜드에 도착하자마자 영주권을 획득하고 영화과에 입학하여 낮은 등록금의 수혜 속에 제2의 인생을 시작하리라는 허황되고 야무진 꿈이 있었다. 2002 월드컵만 보고 가자며 만발의 준비를 하고 감격의 월드컵을 맞았는데 한국-폴란드 전을 기다리던 역사적인 순간, 뉴질랜드 이민법 개정이 발표되고 쉽게 영주권을 획득할 길이 막혔다. 월드컵을 한국에서 만끽하는 대신 치러야 하는 대가는 혹독했다. 다행히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추첨받은 남편은 1년 체류기간을 보장받았지만, 추첨에서 탈락한 나는 여행비자로 입국해서 단기 어학연수로 학생비자를 받아야 했다. 별로 배우는 것 없이 다달이 드는 어학원 비용에다가 늘 간당 거리는 비자 기간으로 초조했다. 그래서 차라리 그 돈이면 한 학기 대학교 등록금을 내고 편하게 6개월 학생비자를 받자는 심산으로 영화과에 등록, 2003년 1학기부터 학교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등록금 납부 얼마 후 아이가 생긴 것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등록금을 한참 미리 납부하지 않았었다면 다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 갔을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타이밍이 그랬다. 지금 돌아 보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 아침에 임신 20주 초음파 검사가 잡힌 것은 상당히 드라마틱하긴 하다. 상징적이라고 해야 하나.
부푼 꿈보다 훨씬 더 부푼 배를 안고 버스 정류장에서 가파른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성실하게 첫 학기를 마쳤다.(한국서 대학 다닐 때는 자체 휴강을 밥 먹듯 하고 극장이 몰려 있는 종로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역시 부족한 자원은 성숙의 어머니시다) 뉴질랜드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시민권자가 되는 출생지주의 원칙 덕분에, 출산 비용은 모두 국가가 책임지고 갓 태어난 시민권자의 부모들에게 다소간의 육아 보조금까지 주어졌다. (지금은 부모 중 한쪽이라도 영주권자인 경우에만 이런 혜택을 준다고 한다.) 한 학기 휴학 후, 학생비자 갱신을 위해 2004년 첫 학기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고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이 길을 걸었다. 학부 입학 후 십 년만에 박사과정를 마쳤으니 십 년은 학생으로, 그 후 다양한 학부에서 강의를 하면서 시간 강사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이 대학 시스템은 계약이 끝나고 다시 재계약이 되는 동안 나를 캠퍼스의 이방인 혹은 ‘불법체류자’처럼 여긴다. 그렇다고 지난 17년 동안 다녔던 이 길이, 도서관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다른 곳을 향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갑자기 코 끝이 찡한 것이, 이 억척스러운 인연을 운명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수천 년 자란 나무가 겨우 20년쯤을 운명이라 여기는 내 비장함을 말없이 내려다본다. 백 년도 못 살 내 눈에는 이 나무가 정말이지 한치도 안 변한 것 같다. 운명이라고 부르려면 아직 한참은 더 이 언덕을 올라야 되는 거였구나. 쉽게 지치거나 실망하지 않기를.
2021. 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