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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린 Mar 08. 2021

엄마의 방

고3 엄마 독립선언

내 일이 많이 밀렸다.


부부가 공유하는 정치적인 성향과는 별개로 마냥 진보적이지 않은 결혼 생활은 여러 역할을 수행하는 나에게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한다. 자처한 상황이라고는 해도 어디 하나 허투루 쓸 수 있는 분초 없이 사는 것 같은데도 성취는 늘 기대 이하다. 결의가 모자란 탓이라고 자책을 하지만 역시 감당하기에 벅찰 정도로 시간과 일상 그리고 마음을 나눠 써야 할 일이 많다. 특히나 고교 마지막 학년을 통상적인 기준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고3을 지근거리에서 거두는 것은 수많은 내적 외적 갈등을 유발한다. 그래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뉴 노멀이자 새로운 에티켓인 이 팬데믹의 시대에 독립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마냥 뒤로 밀리는 책 작업을 최우선으로 생각해도 멋쩍지 않은 작업실을 얻어 연구 이외의 역할 수행과 분리가 가능한 생활공간을 마련했다. 결정에서 실행까지 일주일 남짓 걸렸다. 즉흥적인 결정인 듯했지만 막상 마련하고 보니 내재화된 가부장적 성역할에서 물리적 심리적 거리두기가 가능한 ‘나만의 방’이 절실했음을 새삼 깨닫는다. 인터넷을 연결하지 않아 강의나 클리닉과 관련된 업무 역시 다소 거리를 둘 작정이다.


이 좁은 공간에서 내가 설정한 방향으로 분산되었던 에너지를 모으는 일은 신선하다. 물론 경제적 현실적 이유로 기간이 제한된 독립이지만 버지니아 울프가 일심으로 권고하던 ‘자기만의 방’을 어렵사리 다시 쟁취하고 보니, 결혼과 함께 스스로 물러났던 ‘내 방’을 먼 길을 돌아서 다시 찾은 기분이다. 기념으로 마련한 커피 머신 돌아가는 소리가 새벽부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와 만들어 내는 조합이 상쾌하다.


2021.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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