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코이카 봉사단원 마띠리의 시간
‘으응? 이건 뭐지?’ 미얀마 공항을 나오면서부터 처음 맡는 냄새가 났다.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 절에 갔을 때 맡았던 향냄새, 생선국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 장마철이면 따라다니던 쿰쿰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해외여행을 다녀본 적 없던 나는 나라마다 고유한 냄새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남자도 치마를 입는 나라’라더니 보이는 사람들 모두 긴 치마를 입었다. “샬라 샬라 샬라”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 찜질방처럼 물을 한껏 머금은 후끈한 공기. 2011년 8월 9일 늦은 저녁, 나는 한국을 떠난 지 10시간 만에 물음표로 가득했던 미얀마 양곤에 있었다. 양곤은 미얀마의 옛 수도였다. 2006년에 수도를 네피도로 옮기기는 했지만, 양곤은 여전히 미얀마 최고 도시로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코이카 봉사단원이 현지 적응 훈련을 받는 장소이자 지방 단원이 머무는 ‘유숙소’가 있었다. 나와 함께 간 동기 2명은 현지 사정으로 유숙소 대신 양곤 시내에 있는 미카싸(MiCasa)라는 숙박 시설에 짐을 풀었다. ‘엄마 뱃속에 있다가 세상에 막 나온 아기도 이런 마음일까?’ 나는 머리만 대면 5분 안에 잠드는 재주가 있었지만, 그날 밤은 한참 동안 이불 속에서 뒤척여야 했다.
다음 날부터 바로 현지 적응 훈련이 시작되었다. 훈련 기간 동안 코이카 소속 과장님과 미얀마어를 가르치는 현지인 세야(남자 선생님) 1명, 세야마(여자 선생님) 2명이 함께 했다.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근처에 있는 인야호수에서 1시간씩 운동을 했고, 수업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다. 현장 실습, 기관 방문, 대사관 직원과 선배 단원 교육 등이 중간에 한 번씩 있었고, 대부분의 시간이 미얀마어 공부였다.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배웠고, 다음 날 아침이면 쪽지 시험을 봤다. 수능을 준비하던 때처럼 잠 못 자며 공부했고, 직장 다닐 때와 비슷하게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나와 동기들은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함께 있다 보니 사소한 일로 부딪쳤다. 여고생처럼 조잘대고 서로 어깨를 주물러주며 “으쌰” 하던 미얀마 세 자매는 몸과 마음이 지쳐갔고, 점점 말수가 줄었다. 코이카 국내 훈련 후 마음을 단단히 먹기는 했지만, 베개를 적시며 잠드는 날이 마침내 오고 말았다.
훈련을 시작하고 3주가 지났을 무렵, 문화 체험 활동으로 미얀마 사람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불교 유적지 중 한 곳인 ‘짜익티요’에 가게 되었다. 짜익티요는 둥글고 거대한 바위에 금박을 입혀 마치 바위가 황금처럼 보인다. 선배 단원들과 함께 양곤에서 버스로 6시간을 가서, 트럭으로 갈아타고 1시간을 더 갔다. 그리고 30분을 더 걸었다. 미얀마의 도로 상태는 좋지 않았다. 트럭이 다니는 길은 비포장이었고, 걸어가는 길은 좁고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었으며, 울퉁불퉁한 돌들이 발에 걸려 미끄러질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 길을 가는 동안 우리는 서로 손을 잡아 주었고, 발걸음을 걱정했으며,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꼭 안아주었다. 그 순간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고지가 눈앞인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쏟아졌다. 우산을 쓰고 황금 바위를 둘러보는 동안 빗줄기는 더 굵어져 바위의 금빛을 삼켜버렸다. 다음 날 새벽 비는 그쳤지만, 안개 때문에 황금으로 반짝이는 짜익티요를 보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짜익티요로 가는 길이 험난하여 1년 안에 3번만 올라도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었다. 나와 동기들이 힘들었던 시기에 짜익티요에 다녀온 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오랜 기간 현지 적응 훈련을 담당해 온 과장님의 노하우인지는 모른다. 다만, 짜익티요를 다녀오고 나서 미얀마 세 자매는 서로에게 쌓였던 서운함을 풀었고, 나는 평소 좋아하던 이 글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겼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현재이고,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중에서)
첫날 느꼈던 미얀마 특유의 냄새가 이제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새벽에 인야호수에서 운동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미얀마어로 “밍글라바” 인사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쌩쌩 달리는 자전거와 자동차 사이로 길을 건너는 것도 더 이상 모험이 아니었다. 5월 중순에서 10월 중순까지는 우기라 수시로 내리는 비와 후텁지근한 공기마저 친근했다. 무엇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는 이해할 수 없던 말들 "아얀 뿌대(진짜 덥다)", “네이 까웅대(날씨 좋다)”, “디네이 알롯 숏대(오늘 바쁘다)”가 들렸다.
더 신기한 일은 미얀마 사람들이 내가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걸 듣고 "꼬리야 루묘라(한국 사람이에요)?" 묻는 것이었다. “호웃께(네).” 대답하면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손뼉을 치며 반가워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안녕하세요? 언니, 예뻐요.”, “미얀마 말 잘해요.”라며 알고 있는 좋은 말을 해주었다.
미얀마에서 드라마 <가을동화>가 방영된 이후 한류가 뜨거웠다. 대학에 한국어과가 생겼고,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사람들이 한국어 학원에 다녔다. 시장에 가면 한국에서 며칠 전에 방영된 드라마와 예능 DVD를 살 수 있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집과 회사만 오가던 나는 이 모든 게 놀라웠다. 가끔 '꿈인가?' 싶을 만큼,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가슴 설레었다. 시간이 갈수록 더 그랬다.
양곤에서 8주를 보냈고, 마치 기차를 타고 미얀마 여기저기를 여행한 것 같았다. 창밖으로 산, 나무, 꽃,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 아쉽게 끝난 여행. 옆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용기를 내는 사이에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버렸다. 한국에서와 별로 다르지 않은 빡빡한 일정을 보낸 후, 앞으로 미얀마에서 남은 1년 10개월은 정말 다르게 살기로 했다.
'자세히 보아야/예쁘다.
오래 보아야/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나태주).'
동기가 나에게 써준 시에서 그 방법을 찾았다.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알아보려면,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쏟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는 좀 천천히 걷기로 했다. 무엇을 볼 때 아이들처럼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만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먼저 다가가 웃으며 인사하기로 했다.
“밍글라바, 뙈이야다 완다바대"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