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프롤로그
2003년 스물두 살이던 여름, 별똥별이 쏟아지던 날 할아버지께 용기 내 말했다.
"일 그만두고, 다시 공부해서 대학 갈래요."
"너 가고 싶으먼 가그라. 내가 가라마라 하겄냐."
할아버지는 무심한 표정이었으나 촉촉해진 눈이 하는 말을 들었다. '잘했어야. 이제라도 가서 너 하고 싶은 거 하그라.' 고3 때 수능을 봤지만,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신 후 고향 완도에 남기로 했다. 그때부터 간직해 온 꿈이었다.
얼마 후 서울로 올라와서 입시학원에 등록했고, 3~4시간 자며 공부해서 스물넷 늦깎이 여대생이 되었다. 잔디밭에 앉아 수다 떨고, 책도 쌓아놓고 읽으며, 미팅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공강 때 도서관 알바, 학기 중 저녁 알바, 기말고사가 끝날 무렵이면 방학 장기 알바 사이트를 뒤지기에 바빴다. 스펙 쌓기가 당연하던 그 시절, 휴학 한번 없이 대학 생활을 마쳤다. 졸업한 해 5월 전공을 살려 사회복지 법인에 겨우 입사했지만, 갑자기 시설 직원이 퇴사하면서 그곳으로 발령이 났다.
"우 선생님, 직원 뽑으면 법인으로 다시 부를게."
이사장님 말을 믿으며 야근을 밥 먹듯이 해도 참았다. 하지만 시설의 운영 법인이 바뀌었고 나는 그곳에 남게 되었다.
"뭣이든 배워두면 쓸 데가 있어야."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버텨봤지만, 1년이 지나도록 거기 있어야 하는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 와중에 할아버지마저 떠나보냈다
.
서른이 되던 해 2월이었다. 할아버지는 투병 생활을 하셨고, 그 사이 몇 번이나 고비가 있어 마음의 준비는 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의 이별은 사춘기 때처럼, 수다쟁이의 입을 닫게 했다. 총총걸음이 직장 근처만 가면 느려졌고, 싱글벙글은 아니어도 입꼬리 올려 인사하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앞만 보며 달리던 경주마의 눈가리개가 풀려 버린 듯, 삶이 끝나는 순간을 마주한 뒤 ‘그냥’ 살고 있는 내가 보였다. 사무실 주변을 한두 번 돌다 들어가는 게 일상이 된 어느 날, 지하철역 주변을 얼마나 걸었는지 곧 9시였다. 대학 때 광역버스가 안 와 수업에 2번 지각한 것 말고는 살면서 늦어본 적 없는 내가, 뛰지 않았다. 한 발 두 발 걷는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날 결심을 굳혔다. 직장을 그만두기로.
어렸을 때는 서른이 되면 뭔가 잘하는 게 있고 안정적으로 사는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살아보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다른 의미에서 와 닿았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청춘이었다. 마음먹으면 못 할 것 없던 20대의 배짱은 잃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다행히 나에게 서른은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라는 간절함을 선물했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급하게 가던 회사 대신 산에 올라 가만히 생각했다. 어린 시절 산으로, 들로, 바다로 뛰어다니던 이후 처음이었다. 진달래를 보자 할머니, 고모, 친구들과 꽃잎으로 화전을 부쳐 먹으며 신나게 웃던 날이 생각났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꿈들이 같이 떠올랐다. ‘좋은 선생님, 아프리카 해외 봉사, 평범하게 사는 것’, 이 중에서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걸 하기로 마음먹었다.
교회 유년부에서 소말리아 친구들을 돕기 위해 나눠준 사랑의 빵 저금통을 받았다.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먹지 못해 죽어간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그때부터 막연히 해외 봉사활동을 가겠다는 꿈이 생겼던 것 같다. 2011년 1차 코이카 봉사 단원 모집 공고를 보고 사회복지 분야로 지원했으나, 탈락했다. ‘왜 도대체 뭐하나 쉽게 되는 법이 없는 걸까?’ 싶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것도 아니었다. 자격증이 있는 컴퓨터 분야로 한 번 더 지원했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대학에 붙었을 때만큼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파견 국가 공지를 보기 전까지.
‘미얀마’, 나라 이름이 낯설어 찾아보니 옛 이름이 ‘버마’였다. 어디선가 아웅산 테러에 대해 들어본 기억이 났다. 인터넷을 뒤졌지만 군부 독재 체제라서 그런지 다른 나라들처럼 자세한 정보가 없었다. 코이카 국내 합숙 동안 언어와 문화를 배웠지만, 속이 시원할 만큼은 아니었다. ‘파견국 중 선배 단원의 블로그가 하나뿐인 미지의 나라. 과연 떠나도 되는 것일까?’ 합숙소에서 나올 때쯤 30년을 붙어 다녔던 볼살과 이별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결과를 알고 했던 건 별로 없었다. 과정이 평탄하지도 끝이 좋았던 것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목표를 정하면 일단 뭐라도 시작했고, 간절히 바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왔다. 그래서 이번에도 미얀마가 어떤 곳이든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일단 가보기로 했다. 이 이야기는 앞만 보고 달리다가 브레이크가 걸린 덕분에 잠시 멈춰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하며 보냈던 시간을 정리한 글이다. 그리고 조건 없는 사랑과 우정을 나누었던 사람들과의 추억이고, 그들이 사는 세상을 소개하는 건 덤이다. 미얀마 제2의 도시 만달레이에서 ‘마띠리’가 되어 온전히 나로 살았던 그 시간을 소개하고 싶다. 누구에게? 한 번쯤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내 마음대로 살아보고 싶은 분, 해외 봉사활동에 관심이 있는 분, 다시 꿈꾸며 살고 싶은 분들께.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앙드레 말로.'
'Rome was not built in a day.'
'나는 할 수 있다.'
고등학생 때부터 책상에 붙여 놓고 수없이 외웠던 주문을 선물로 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