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한국에 오기 전 나의 계획은 한국에 와서 그동안 하던 글쓰기와 책읽기에 더 집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상 이곳에 오니 이런 저런 상황으로 매일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7개월간 책 출간이라는 목표로 달려왔으니 한 달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마음이 올라와 이미 나는 그 마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렇게 몸도 쉬고, 글에서 잠시 멀어져 가족과 친구와 시간을 보냈다.
며칠 전, 갑자기 노트북이 고장났다. 새벽 독서에도 참여해야 하고 매일은 아니어도 글을 써야하는데 난감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앗싸, 컴퓨터도 되지 않으니 조금 더 쉬어도 되겠구나.’ 라는 또다른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건 '쉼'이 아니라 '빼앗김'임을...
쉬어야 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이를 악물고 두 배로 나아가야 할 때였는데 나는 멈춰 서 있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한다.
노트북이 안되니, 핸드폰으로, 수기로라도 글을 쓴다.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멈췄던 걸음만큼 두 배로 해내야 한다.
세상에는 그냥 주어진 것이 없다.
세상에 쓰임 없이 존재하는 것도 없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질서에 기여하기 위해 태어났고,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 내 앞의 모든 사물, 자연, 사람들 — 모두 효용과 목적이 있기에 여기에 있다. 그것의 세상의 원리이며 신의 섭리이다.
“어떤 단일 사건이든 모두 우주의 전체 계획 중의 한 필수 부분을 이루고 있으면서 전체의 공동 질서와 행복을 촉진하는 데 공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그리고 인류의 악덕과 우둔한 행동은 그들의 지혜나 악덕과 마찬가지로 이 계획의 한 필수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악으로부터 선을 연역해 내는 영원한 예술을 통하여 죄악과 우둔함 역시 마찬가지로 대자연의 위대한 체계의 번영과 완선에 똑같이 공헌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주1)”
우리는 태어났기에,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빼앗기고 만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한복음 15:1~2>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마태복음 7: 18~19>
나는 이것이 나를 위한 배려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험도, 휴식도 아닌 '경고'였다.
신은 우리에게 각자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모든 능력을 이미 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죄로 인해 양극의 세계에 갇혀, 내 안의 힘을 알지 못하고 의심과 두려움에 빠져 살아간다.
그 인식으로 내 안에 나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의심하고 좌절하고 염려하며 살아간다.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내 안의 힘을 믿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우리는 각자의 열매를 맺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그 사명을 외면할 때, 그 능력은 빼앗긴다는 것을...
그러니 내 안에 주신 능력으로 멈춰 있던 걸음을 다시 내딛어야 한다.
내일도, 모레도 —
끝내 풍성한 열매를 맺고, 목적을 이룰 때까지..
“삶에서 중단해도 되는 유일한 경우는 정상에 올랐을 때다.(주2)”
주 1> 도덕감정론, 애덤 스미스, 비봉출판서, 2009.
주 2> 멘탈의 연금술, 보도 섀퍼, 토네이도,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