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쁜손 Jun 24. 2022

비 오는 날의 작은 음악회.

허기진 영혼을 채우는 음악이란 선물.


 정오 무렵부터 장맛비가 세차게 퍼붓는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가 반가우면서도-오늘 시내에서 점심, 저녁 약속이 연달아 있는 날이라-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잠시 난감했다. 집에서 약속 장소까지 지하철로 40분쯤 소요되니 걷고 열차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1시간이면 도착할 것이다. 오랜 친구 K와의 점심식사 약속만이라면 최대한 가벼운 옷차림으로 출발하면 되겠지만, 저녁에 브런치 동료 작가 J와 음악회에 가기로 약속이 된 터라 옷장에서 재킷을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거센 폭우 사이를 10분쯤 걸어 지하철역에 도착하니 데님 스커트 아래자락과 신발이 어느새 다 젖어 버렸다. 불편함과 꿉꿉함도 잠시 반가운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만으로도-약속 장소로 향하는 이 시간이 들뜨고 설렌다.

 좀 늦은 점심이라 평소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에 줄을 서지 않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생선구이와 된장찌개가 세트로 된 솥밥을 주문해 기다리는 사이 친구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니 내리는 빗속을 뚫고 친구를 만나러 온 보람이 있다.


 고단한 마음의 평안을 위해 몇 달 전부터 오로지 예배에만 집중하던 내가 참으로 오랜만에 세상으로 나와 사람의 숲을 거니는 느낌. 이것이 오늘 내가 나의 마음을 표현한 적절한 비유일 것이다. 이야기 중간중간 창밖을 본다. 내리는 빗줄기가, 무수히 쏟아지는 빗방울들이 나의 마음을 차분히 적신다.



 향기 좋은 차와 정겹고 편한 친구와 담소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음악회 전에 미리 만나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한 J를 만나기 위해 친구와 조금은 아쉬운 작별을 했다. 약속한 장소에서 멀리 J의 모습이 보인다. 브런치란 매개체를 통해 지난해 가을 처음 만난 지 이번이 4번째 만남이다. 전업주부였던 나와 달리 몇십 년을 직장생활을 한 그녀는 에너지 넘치고 참 부지런한 사람이다. 내게 없는 장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 사이 공통분모는 없지만 브런치와 문학,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과 동시대를 살아온 또래라는 공통점이 말하지 않아도 끈끈한 연결 고리가 되는 것은 아닐까. 많은 말보다 때론 침묵의 언어와 몸짓이 타인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할 수도 있음을 연륜을 통해 알 수 있다.

  북아현동에 위치한 아트홀에 공연 한 시간 전에 도작해서 아트홀 안에 있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요즘의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매사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는 나와 달리 열정적인 그녀는 역시 못 보던 사이에도 자기 계발에 부지런히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요즘 새로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의 고충과 기대감을 토로하는 말투에 그녀의 기분 좋은 설렘이 느껴져 나도 좋은 자극을 받았다.



 주민들을 위한 서울시향의 무료 공연은 서울시의 25개의 자치구들을 순회하며 연주하는 작은 음악회이다. 무료라도 전혀 연주의 질이 떨어지지 않는, 수준 높은 음악회를 가까이서 즐길 수 있는 직접 찾아가는 음악회이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대기줄에 서서 입장 시간을 기다렸다. 다행히 앞줄에 줄을 서서 무대 정중앙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착석할 수 있었다. 연주 30분 전.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나의 가슴을 뛰게 한다. 비 오는 날에 맛보는 클래식 음악의 선율은 미처 연주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충분히 나를 흥분시켰다.

 

 오늘의 연주자들이 무대에 나와 인사를 하고 작품의 해설자가 작곡가와 곡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가며 곡의 이해를 도와 클래식의 문턱을 낮추었다. 첫곡은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가 16세 때 작곡한 곡 디베르티멘토 1악장으로 경쾌하게 음악회의 서두를 시작 했다. 일일이 연주자들의 표정과 몸동작들까지-아니, 그들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는 생생한 현장이 고스란히 피부에 느껴졌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를 눈물짓게 한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4중주 1번 Op.11 안단테 칸타빌레 2악장은 너무 아름다워 나 역시 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들었다. 극한 슬픔은 극한 아름다움과 닮아있다. 그 작품을 들으며 내 지나간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나는 현악기 중 비올라를 가장 좋아한다. 특히 용재 오닐의 비올라 연주를 좋아하는데,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을 비올라 연주자 임요섭의 독주로 듣게 되었다. 오늘 연주된 곡 중 가장 진한 여운을 선사했다.

 공연 후반부에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영화 미션의 '넬라 판타지'와 알 파치노가 주연한 '여인의 향기'란 영화에 삽입된 탱고 곡이 쭉 이어졌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폴카는 현악기의 줄을 처음부터 끝까지 튕겨 연주하는-피치카토 주법으로-또 다른 곡의 묘미를 느끼게 해 주었다.

 

 숨 막일 듯 아름다운 공연 대미를 장식한 곡은 피아졸라의 리베르탱고로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70분이란 공연 시간이 꿈결처럼 진한 여운을 남기며 순식간에 끝이 났고 아쉬움에 가슴이 한동안 먹먹했다.



 인생은 덧없이 짧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단순한 진리를 되새기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동안 메말랐던 나의 공허한 영혼이 채워지는 느낌에 오늘의 피곤함도, 삶의 고단한 무게감도 이 순간 깃털처럼 가볍게 여겨졌다.

 나를 위로한 여러 공연이 있지만 J 그녀와 장맛비 쏟아지던 오늘 맛보았던 현악기와 피아노의 앙상블은 앞으로의 전진하는 삶에 좋은 기억과 용기를 줄거라 믿는다. 오랜 가뭄으로 타들어간 나의 마음밭을 해갈시킨, 단비 같은 공연을 나는 아마도 오래도록 기억하고 추억할 것이다.


  빗소리가 잦아드는 깊은 밤. 들뜬 마음을 추스르며 빗소리를 음악 삼아 잠을 청해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