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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Nov 03. 2022

세상은 아직 따뜻하고 살만하다.

 절친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거리가 있어 자주 볼 수 없는 여고 동창생이지만,  가끔 전화 통화만으로도 충분히 서로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전해지던 따뜻한 친구이다. 직장에 있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조금 동생네서 저녁 준비를 하는 일을 일찍 마치고 퇴근하겠다고 연락을 했다. 서둘러 저녁 메뉴로 준비한 제육볶음을 반쯤 조리해 놓고 뭇국도 끓여 동생이 퇴근해서 데워서 조카들과 먹기 편하게 준비해 놓았다.

 시간이 늦은 오후여서 집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고 가기엔 빠듯해 좀 난감했다. 그래도 점퍼이지만 검은색이라 좀 더 격식에 맞게 갖춰 입지 않아도 친구가 이해를 해 줄 것 같았다.


  길치이고 겁이 많은 나에게 온양온천이라는 낯선 도시는 혼자 가기엔 두려움의 대상이지만-어머니도 일찍 여의고 혼자 외동 이인 친구에게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는 것이 나의 도리인 것 같아 마음이 급하다. 휴대폰을 들고 최적의 경로를 검색한다. 서울, 내가 사는 강동구에서는 수서에서 srt고속철도를 타고 천안아산역에  하차해 1호선 아산역으로 갈아타고 온양온천역에 내리는 것이다. 이 미션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집순이라 내  바운더리는 거의 집에서 30분 이내의 거리. 그 안에서 거의 대부분의 모든 일이 이루어지니 온양온천이 어디 낯선 외국의 지명처럼 까마득히 여겨진다.



 열차표를 구하기 위해 고속철 앱을 깔고 시간표를 검색한다. 이미 늦은 오후라 내가 원하는 시간대는 거의 매진이다. 7시에 수서에서 천안아산으로 출발하는 표를 예약하고 돌아오는 기차표는 10시 17분 차로 예매까지 끝내니 한걸음은 내디딘 기분이다. 서두르다 보니 출발 50분 전에 수서역에 도착했다. 근처 카페에서 디카페인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 대기실에 자리를 잡았다.

 

 나의 다정하고 살가운 여고 동창생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3년 전이다. 대전에 거주하는 친구가 볼 일이 있어 서울 나들이를 한 김에 나를 만나고 집으로 내려갔었다. 말수도 서로 적은 편인 우리 둘이지만 솔메이트 같은-나와 성격이 비슷한 친구이다. 일찍 사별해서 혼자 아이를 키우느라 동분서주 바쁘게 살림하고 직장생활을 해내는 안쓰러운 친구이다. 친구와의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전광판에 내가 탑승할 열차 차량번호가 깜박인다. 출발 15분 전이다. 탑승할 플랫폼 번호를 재차 확인하고 5번 게이트로 들어가 열차에 탑승했다.

 

 좌석에 앉아있다 보니 낯선 목적지 생각에 불안감이 올라와 가슴이 콩닥콩닥 사정없이 뛰기 시작한다. 우울증이 심했을 때 공황 증상까지 함께 와 참으로 힘든 적이 있었다. 낯선 장소, 낯선 환경,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이 힘든 적도 있었다. 많이 회복되었지만 가끔 악몽처럼 그때 느꼈던 불안감이  올라오면 참으로 힘들고 당황스럽다. 지금 긴장하니 그때 느꼈던 고약하고 견디기 힘든 감정이 살아난다. 눈을 질끈 감고 차분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40분의 시간이 영원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중간 목적지인 천안아산역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을 듣고는 그제야 길게 안도의 심호흡을 한다. 열차의 간이 계단을 이용해 플랫폼에 내리고 보니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진다. 표지판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침착하자고 내게 주문을 건다. 내년이면 쉬흔 일곱 살이 되는 나는 아직도 아줌마 특유의 강단과 뻔뻔함은 찾아볼 수 없다. 나름 산전수전 다 겪었다 생각했는데 여전히 여리고 소녀 같은 감성을 지닌 나이기에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고단하고 힘들다.

 

 잠시 당황하던 마음을 다독이고 나를 진정시킨 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본다. 플랫폼 벤치에 앉아있는 중년 여성에게 다가간다. "안녕하세요? 말씀 여쭙겠습니다. 여기서 1호선 온양온천역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할까요?" 여자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타지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낙심한 내가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을 눈으로 분주히 좇는다. 불현듯 서울과 천안아산이 근거리이니 서울로 출퇴근하거나 등하교할만한 젊은이들에게 묻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실례하겠습니다. 여기서 온양온천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면 될지 아세요? " 하고 앳된 청년에게 용기를 내서 길을 묻는다. 청년이 잠시 멈춰 서더니 이내 흔쾌히 대답한다. "네 이곳이 지하철로 환승하기가 복잡합니다. 마침 제가 온양온천역으로 갑니다. 같이 가세요.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하며 어느새 나란히 청년과 목적지를 향해 걷는다. 5분쯤 걷다 보니 1호선 아산역 온양온천역 방면 플랫폼에 다다렀다. 서글서글한 청년과 함께 걷고 지하철을 기다리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20여분을 대화하다 보니 29살의 잠실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잠시 어머니 생신을 축하드리기 위해 본가로 내려왔고... 얼마 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아프다는 그래서 다른 사랑을 하기 두렵다는 그. 청년과 같은 또래의 아들을 둔 내가 아들 같은 그에게 이런저런 눈높이에 맞는 인생의 지혜를 나눈다. 마스크 쓴 서로의 얼굴은 볼 수 없지만 환한 미소의 선량한 청년의 모습이 눈앞에 또렷이 보인다. 짧은 시간 이태원 참사의 아픈 소회까지 서로 주고받으며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청년은 친절하게도 내가 수서로 올라갈 때 기차 시간에 맞게 타야 할 지하철의 시간까지 알려주며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서로서로 돕고 살아야죠 하며 너털웃음을 웃는다. 개찰구를 빠져나오며 내가 고맙다고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덕담을 했다. 좀 전에 그가 한 말. 젊은 아가씨들이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씁쓸한 그의 모습이 떠올라 아니라고 강조하며 착하고 선량한 사람을 알아보는 아가씨들이야 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좋은 분 만나시길 간절히 바란다고 악수하는 손에 힘을 주어 감사함을 전달하였다.



 우연히 만난 그와의 유쾌한 짧은 만남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젠더 간에, 세대 간의 갈등이 만연해 소통이 부재하는 사회라고 다들 말하지만 아직도 따뜻한 정과 사랑이 넘쳐나는 사회. 거의 30년이 다 돼가는 젊은이와 기분 좋게 삶과 인생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살면서 좋은 추억으로 기억될 거라는 확신이 선 낯선 도시에서의 경험이었다.

 어쩌면 그와 내가 가장 서로 진실된 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던 것은 임금님은 당나귀라는 동화 속에 나오는 대나무 숲처럼 서로에게 완벽한 비밀의 숲이 되어 주었던 것은 아닐까.


 아직 세상은 따뜻하고 살만하다는 것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의 미래가 될 젊은 이들에게 희망을 보았다. 진심으로 우리의 다음 세대를 축복하며  이태원 참사로 꽃 같은 젊은이들이 희생된 것을 가슴 깊이 추모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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