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간다. 노랗고 붉은 나뭇잎들이 도로 위에 수북이 쌓였다. 바스락 소리 나는 낙엽을 밟으며 가을 정취를 느끼며 걷는다. 맑은 햇살이 눈이 부신 늦가을 날이다. 어젯밤 단톡방에 오늘의 번개모임을 알리는 알림이 떴다. 예전 교회 셀모임이 인연이 돼서 만나기 시작한 지 벌써 15년이 다돼가는 집사님들과의 모임이다. 54세의 막내부터 올해 환갑이 된 맏언니까지 성품이 온화하고 무던한 사람들이라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같이 있으면 편안한 사람들. 재미없고 말수 적은 나와 달리 유쾌하고 떠들썩한 막내와 언니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즐겁다.
중간 약속 장소 복정역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분당에서 오는 P집사님과 다른 일행들을 만나 남한산성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고 인근 메밀 맛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시간이 정오를 가리킨다. 햇살 아래 서있으니 따뜻한 기운에 나른한 행복감이 밀려온다. 11월 말의 늦가을에서 봄의 기운, 봄 내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담장 위 철 모르고 핀 장미 한 송이와 늦가을 답지 않은 포근한 기온 탓일 것이다. 이래저래 나들이 가기 좋은 날씨다. 십여분쯤 기다리니 저기 P집사님의 차가 보인다. 반가움에 손을 흔든다.
남한산성의 가파르고 좁은 도로를 따라 자타공인 베스트 드라이버 P집사님의 차가 유연하게 미끄러진다. 차창을 활짝 열고 숲의 기운과 숲의 내음을 들이마시는 마음만은 소녀 같은 동생과 언니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며칠 전 내린 비로 이미 나목이 돼버린 나무들의 숲. 숲은 이미 겨울로 들어섰다. 향긋한 나무들 특유의 냄새가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정화시킨다.
무수한 잎들이 바람에 꽃처럼 날린다. 잠시 상념에 잠긴다. 나의 삶이,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덧없는 시간, 세월의 힘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 시간의 영속성에 비해 한낱 인간의 삶은 찰나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하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오늘도 멤버들이 내게 많이 먹으라 이것저것 챙겨준다. 마른 체형인 내가 듬직한(?) 언니들 보기에 안쓰럽게 느껴지나 보다. 계절성 우울증이 심한 나의 가을 앓이는 가을이 가면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지만 빠진 체중은 좀처럼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핼쑥해졌다는 걱정 섞인 인사말들이 오고 가고 내 앞으로 맛있는 음식들을 언니들이 밀어 놓는다.
막내 S여사의 즉흥적인 강보고 싶다는 투정에 멤버들이 만장일치로 가까운 양평 두물머리로 향한다. 5명이 탄 차가 너무 묵직해서 속도가 안 난다는 P집사님의 말에 일제히 서로를 가리키며 다이어트하라며 깔깔거리며 웃는다. 희끗한 머리의 중년 여성들의 주름진 얼굴에 꽃 같은 소녀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강은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든다.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일렁이는 강물이 보드랍고 매끈한 자태를 뽐낸다. 이상하다. 정점의 아름다움은 슬픔과 눈물을 동반한다. 갑자기 시간이 정지된 듯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아득하게 멀리 느껴진다. 군중 속에서도 고독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외로움이 이 순간 나를 쓸쓸하게 하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 또한 살아있음의 증거임을... 고독은 나를 찾아가는 여정임을... 어리석은 나 또한 확실히 알고 있는 진실인 것을 다시금 깨닫으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들여다본다.
깊은 커피 향에 가을을 담아 마신다. 계절을 거스른 날씨 탓에 카페의 야외 테라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꽃과 자연이 좋아지면 나이를 먹은 증거라는 말처럼 해마다 자연의 변화에 대한 태도가 깊어지고 진지해진다. 눈으로 열심히 늦가을의 정취가 담긴 하늘과 땅과 강의 빛을 좇아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22년, 쉬흔 여섯의 가을. 이 순간은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임을 알기에 더없이 소중하다. 만약 노래 가사처럼 시간을 병 안에 가둘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삶에서 어떤 시간을 담아 놓을까. 아마도 그것은 지금 이 순간.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가 아닐까.
언니들과 동생이 부지런히 다음 여행 일정을 잡는다. 겨울이 오기 전에 한번 더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자며 일주일 뒤 강화도로 떠나자고 제안을 한다. 일 때문에 망설이는 내게 다른 집사님들이 내게 시간을 맞춰 일정을 잡는다. 아직 집 주위를 떠나면 불안해하는 나이지만 한발 한발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울타리를 벗어난 세상이 두렵긴 하지만 불안한 마음속에 세상에 대한 새로운 기대가 싹트고 있음을 인지하며-갇혀 있던 나를 세상 밖으로 손을 잡고 함께 걸어 줄 친구들이 있어 이 가을이 슬프지만은 않다.
시간은 여전히 빠르게 흐르겠지만 사람 인자의 모습처럼 서로서로 기대며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환하게 웃을 날도 분명히 올 거라는- 믿음이 이번 짧은 여행을 통해 얻게 된 큰 수확이다.
비록 만성 우울증에 불안장애를 달고 사는 집순이지만 그래도 삶에 대한 소망과 희망이 내게 아직 남아 있음이 감사하다. 나의 부족한 점을 직시하고 인정한 순간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의 강화행에서는 나는 어떤 나의 모습을 만날 수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낯선 여행지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이다. 불안과 두려움을 뚫고 나온 희망이란 놈이 나를 보고 웃는다. 나를 구속하던 두려움은 이젠 나를 지배할 수 없다. 밝음은, 빛은 제 아무리 작아도 어둠을 몰아낸다. 희망은 빛이다. 나는 어느새 한걸음 빛으로 나아가 그 속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