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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Feb 23. 2024

대나무 숲에서 바라본 설경

재혼 에피소드


 지난 설에 아들이 용기 내어 남편의 형제 모임에 와 주었다. 오직 엄마를 보려는 마음으로 낯선 남편의 일가족들이 북적대는 집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모습을- 일하는 중간중간 보고 있노라니 고맙기도 짠하기도... 참 복잡한 마음이 뒤섞여 신경이 아들한테 쓰이기도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일 뿐. 다시 손님 접대에 몰두했다.

 저녁을 먹고 일부러 서둘러 바쁘니 먼저 일어나라 하고  어른들께 인사를 시키고 주차장으로 배웅을 간다. 아들과 둘만의 오붓한 그 5분이 너무 고맙다. 내 가슴에 안기는 너무 커버린 아들에게 반대로 안기며 사랑한다고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니 아들이 엄마가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싱긋 웃는다.


 머릿속에 지우개가 들었는지 아들이 가고 나니 미처 챙겨주지 못한 것이 눈에 띈다. 기억력이 비교적 좋은 편인데, 요즘엔 메모를 안 하면 깜박하고 종종 잊곤 한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낼모레면 육십을 바라보니 당연한 거겠지 하고 나지막이 중얼거려 보지만 가슴으로 쌩하게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간다.



 벨이 울린다. 남편한테 온 전화다. 휴대폰 화면에 선명하게 '우리 자기'란 호칭이 떠오른다. "응 나야, 바쁘지 않아요? 점심은요?" 하고 물으니 남편은 느닷없이 "가지고 싶은 거 있어? 자기 생일이 일주일 남았네. 생각해 둔 거 말해. 사줄게. "

 "응 갖고 싶은 거 있지. 솔직히 말하길 원해?"하고 깔깔 웃었다. "응 작은 거야. 근데 가격은 비싼데... 괜찮아? 아니면 봄 스카프도 괜찮고... "

 이 말이 끝나자마자 그리고는 가격을 듣고는  남편이 왁왁 소리를 지른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캐릭터인 남편이라 계속 깔깔 웃으며 "취소, 취소! 그냥 용돈 조금 주세요. 잘못했습니다!"하고 한참 잔소리 시작하는 남편의 입을 막는다.


 서운하지도 않다. 마음 약한 남편은 겉으로만 왁왁거릴 뿐. 통이 크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마음 한편에선 하나, 둘. 셋을 세고 있는데 금세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다.



 평소 가지고 싶던 18k 목걸이라~ 속으로 예스! 를 외치며 주얼리 업체 사장인 친구에게 원하던 디자인으로 주문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얼마 있으니 친구가 전화를 했다. 남편이 따로 친구에게 전화해 내 건강 걱정과 주문한 목걸이를 내 마음에 쏙 들게 맞춰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겉으론 뚝뚝함의 극치를 이루지만 파헤칠수록 보드라운 남자. 내가 늦복이 터진 것 같아 감사의 말이 저절로 나온다.

 아들이 어제 느닷없이 오늘 내가 사는 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자고 한다. 보고 간지 열흘밖에 안 되었는데 아마 다음날이 내 생일이라 그런 것 같다. 일 년 내내 생일만 같아라~ 하는 주문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다.



 11시 반쯤 도착한 아들에게 먹고 싶은 것을 물으니 내가 좋아하는 파스타를 먹으러 가자고 한다. 지난 기념일에 가보았던 실내가 온통 대나무로 장식된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다.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레스토랑 2층에서 한강이 보이고  어제 내린 폭설로 사방천지가 눈에 쌓여 있으니 눈이 호강하고 사랑하는 아들이 곁에 있으니 마음이 호강하는 셈이다.

 참 사람일은 알 수 없다. 내가 이런 호사스러운 생일을 누리다니... 알람이 울린다. 새로 얻은 딸에게서 카톡이 왔다. '어무이,생신 축하해요!' 어무이... 찌릿한 전기가 온몸을 흐른다. 내 생파의 절정은 막내딸이 부른 '어무이'라는 단어이다.


 예쁜손, 거봐. 낙담하지 않고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올 거라 했지. 분에 넘치는 행복에 곁에 있는 아들도 잊고 눈이 빨갛게 울다 보니 어느새 아들이 슬그머니 내 손을 꽉 잡는다. 이 귀한 사랑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나누며 살고 싶다.

 대나무 숲에 고요한 바람이 흐른다. 바람도 햇살도 설경도 나를 축복한다. 받은 축복의 지경을 넓히는 사람으로 살기로 조용히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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