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가 찾아왔다. '이제 봄이 오려나보다. ' 하고 천지에 내린 봄기운을 만끽하려 들 때 영락없이 찾아오는 겨울의 끝자락, 꽃샘추위. 집을 나서는데 매운 칼바람이 걸음을 급히 서두르게 만든다. 걸어서 5분 거리의 단골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늘 앉는 그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본다. 거센 바람이 마른 나뭇가지와 도로가에 붙은 현수막 등을 사정없이 출렁이게 만든다. 창이라는 경계사이로 봄과 겨울이 공존하고 있다. 낯익은 재즈 음악이 흐르는 카페 안에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샷을 추가한 진한 커피 한 잔. 그 진한 씁쓸함이 삶을 농축해 담아낸 것 같아 혼자 피식 웃었다.
오늘 남편은 딸의 시부모님이 될 사돈과 상견례자리가 있어 외출했다. 엄밀히 말하면 남편의 딸. 참석은 딸의 생모인 남편의 전처와 함께 예비 사돈을 만난다. 나는 그러려니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데 남편은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말이 많아진다. 괜찮다는 표현대신 그의 등을 토닥였다.
지난 1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늘 혼자였던 내가 남편과 그의 대가족과 인연을 맺고 가족의 대소사를 함께 하였으니... 늘 부담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큰 환상 없이 한 결혼이기에, 나름 잘 적응하고 이제는 아이들과 그의 형제들에게 거부감 없이 형수로, 형님으로 올케로 그리고 새엄마로 자리매김했으니 참으로 다행스럽다. 얼마 전 내 생일에 막내딸로부터 '새' 자가 빠진 그냥 어머니란 호칭의 생일카드를 받았을 때 그 감동은 그간의 가족들과 빨리 융화하고자 했던 내 노력이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남이었던 사람들이 모여 가족이 된 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인연이라 이 귀한 연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부디 소중한 인연이 아름답게 유지되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물러서지 않으려는 겨울의 기세가 오늘은 대단한 날이다. 카페 앞에 세워져 있는 입간판이 세차게 흔들리며 여러 차례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카페 내부 안의 고요랑 사뭇 대조적이다. 늘 모임에 나를 동반하기를 좋아하는 남편덕에 혼자 있을 시간이 부족한 내게 오늘의 남편 혼자의 외출은 내게 주어진 휴식, 휴가의 의미이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외로워서 짝을 만났으면서도 혼자 있었을 때의 자유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하긴 혼자 지낸 시간이 함께 한 시간보다 몇 배 더 많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부분에 대해 남편에게 미안해하고 싶지는 않다. 때로 서로 기대며 함께 가는 것이 사람, 삶이지만 한편으로는자기 충전의 시간이 있어야 서로에게 더 잘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남녀의 다름을인정하고 각자의 동굴을 존중해 줄 때 둘이 가는 길이 조금 힘들고 낯설어도 버틸 수 있는 에너지가 채워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편의 표정이 밝다. 표정을 보니 상견례 자리가 만족스러웠나 보다. 그가 반대로 내 표정을 살핀다. 퉁명스러운 그가 식사는 했나 하고 묻는다. 반나절의 내 충전의 시간은 지나갔고 가득, 백 프로인 에너지로 남편을 맞이한다. 살갑지는 않은, 말수 적은 나이지만 오늘은 종알종알 종달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따뜻한 생강차를 따라서 남편께 대령하고 그의 옆에 앉는다.
아직도 바람은 거세다. 붉은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나지막이 으르렁대는 바람소리를 뒤로 하고 언젠가 볼 물오른 생생한 나무들과 활짝 핀 꽃들을 눈앞에 떠올린다. 내 곁에서 평소답지 않게 부쩍 말이 많아진 남편이 내 눈치를 보며 오늘의 일정을 보고하고 나는 열심히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둘이 하는 삶으로 돌아왔다. 이 삶이 내게 다시 찾아온 봄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말이 많아진 남편의 손을 슬그머니 꼭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