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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 Mar 04. 2021

비극적 희망을 꿈꾸는 것

연극 <생쥐와 인간> 리뷰


* 이 리뷰에는 연극 '생쥐와 인간'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거나 관람 전 내용을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유의 부탁드립니다 :)





1. 꿈꾸는 이들
 
   두 남자가 도망치고 있다. ‘조지’와 ‘레니’다. 겨우 숲에 당도한 둘은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본다. 나란한 그림자가 서로에게 퍽 의지되어 보인다. 연극 <생쥐와 인간>의 첫 장면이다.
 
   영리한 ‘조지’와 힘세고 어리숙한 ‘레니’는 친구 사이다. 한 달에 겨우 50달러를 받으며 이 농장, 저 농장을 떠도는 신세지만 두 사람에게는 꿈이 있다. 작은 집과 땅을 사서 토끼를 키우는 것, 비가 막 쏟아지는 날에는 “오늘 일 접자!”고 말할 수 있는 것, 우리가 심은 곡식을 우리가 수확하는 것. 내장이 터지도록 곡식 자루를 나르면 시내에 나가서 사고 싶은 것을 사고 위스키도 마실 수 있지만 둘은 그러지 않았다. 꿈이 있었으니까.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동경한다. 농장주의 아들인 ‘컬리’는 아내를 사랑한다. 하지만 ‘컬리부인’의 꿈은 헐리우드에 가서 배우가 되는 것이다. 마을에 극단이 오면 마음껏 공연을 보고 싶은데 자신을 속박하는 남편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늙고 다친 일꾼 ‘캔디’는 새끼 때부터 키우던 개를 안고 다닌다. 이제 늙고 병들었으니 그만 개를 죽이자는 사람들에게서 개를 지키고 싶다. 모두의 꿈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시인 로버트 번즈가 “생쥐에게”에 썼듯 일은 제멋대로 어그러져 한낱 인간의 삶에는 슬픔과 고통이 가득해지고 만다.  



                                                       (사진출처-빅타임프로덕션 인스타그램)




2. 생쥐와 인간
 
하지만 생쥐야.
앞날을 예측해봐야 소용없는 건 너만이 아니란다.
생쥐와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잘 짜도 일이 제멋대로 어그러져,
고대했던 기쁨은 고사하고 슬픔과 고통만 맛보는 일이 허다하잖니!
- 로버트 번즈, “생쥐에게” 中
 
   레니는 부드러운 것을 좋아했다. 쥐, 강아지, 벨벳을 살살 쓰다듬으면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어느 날 일꾼들의 숙소에 짐 가방을 숨기러 컬리부인이 들어온다. 그녀는 헐리우드로 꿈을 찾아 떠날 것이다. 헐리우드에서 컬리부인이 아닌 배우 ‘로렌, 바네사, 혹은 바바라’로 살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레니에게 들키고 말았다. 둘은 서로의 비밀을 나눈다. 레니도 조지, 캔디와 함께 곧 농장을 떠날 것이다. 농장을 떠나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셋이 함께 살 것이다. 서로에게 비밀을 말하자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린다. “레니, 부드러운 것을 좋아한다면 내 머리카락을 만져 봐도 좋아요.” 살살, 아주 살살. 레니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살살, 아주 살살. “아야! 아파요! 그만!” 조용히 해요. 문제를 일으키면 안 돼요. 조지가 들으면 화를 낼 거예요. 그래요, 지금처럼 조용히 해요. 그녀는 숨을 쉬지 않는다. 레니가 쓰다듬었던 쥐와 강아지들처럼.
 
   컬리는 늘 왼손에만 가죽 장갑을 끼고 다녔다. 장갑 안쪽에는 바세린이 듬뿍 발려 있다고 했다. 아내를 위해 오른손은 투박할지언정 왼손만은 부드러워야지. “아니, 이 사람은 왜 일꾼들 숙소에서 자고 있어? 일어나, 얼른!” 아내를 흔들자 그녀는 축 늘어졌다. “레니 이 자식 어딨어? 죽여버릴 거야.”
 
   “내가 기르던 개 못 봤나?” 다리를 절룩거리며 캔디가 황급히 뛰어온다. “얘가 아파서 혼자 걷지도 못하는데, 농장 어디에서도 보이지를 않아! 얘가 대체 어디...” 탕. 멀리서 총소리가 들린다.
 
   로버트 번즈는 어느 날 쟁기질을 하다가 쥐의 집을 부숴버린다. 쥐가 열심히 일구었을 보금자리가 처참히 부서진 것을 보고 쓴 것이 위의 시 “생쥐에게”다. 집이 무너진 생쥐와 꿈과 욕망이 좌절된 인간. 미래를 꿈꿀 틈 없이 무자비한 현실에 짓밟히는 존재. 결국 우리는 모두 생쥐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일까, 원작 소설의 작가인 존 스타인벡이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가이기 때문일까. 극에 등장하는 인물의 소박한 꿈들은 모조리, 그리고 무참히 짓밟힌다. 의도치 않게 컬리부인을 죽인 레니는 일전에 조지와 했던 약속을 떠올리며 숲으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 숨어 조지를 기다린다. 조지는 레니를 찾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총을 든 마을 사람들이 레니를 찾고 있으며 현실에서 도망칠 길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조지는 레니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수없이 나누었던 두 사람의 꿈.
 
“우리 같이 목장에서 일하는 놈들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들이야. 하지만 우린 아냐. 왜냐하면 서로가 있으니까. 우리는 작은 집과 땅을 갖게 될 거야. 거기에서 소와 돼지, 토끼를 키울 거야. 나는 알파파를 기르고 너는 그 알파파를 토끼에게 줄 거야. 레니, 저 강 너머를 봐. 그 세상이 정말 보이는 것 같지 않아?”
 
“응? 어디? 조지, 난 안 보여.”
 
“저기 강 너머. 저 세상에 가면 골치 아플 일도, 싸울 일도, 남의 걸 훔칠 일도 없고 진짜 좋을 거야.”
 
“......응, 보여. 나 보여, 조지...”
 
 


3. 이 세상 너머
 
   사랑하는 이와 행복하게 살고 싶은 꿈, 헐리우드로 떠나는 꿈, 토끼를 기르는 꿈, 우리 집에서 우리만의 곡식을 수확하는 꿈, 늙고 병든 개의 곁을 지키려던 꿈. 이토록 평범하고 작은 꿈을 이들은 어디에서 이룰 수 있을까?
 
80년 전에 쓰인 작품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조지와 레니가, 캔디가, 또 컬리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내 집 마련을 위해 2달러 50센트의 술값을 아끼며 산다. 늙고 병든 이들은 외롭게 버려지고, 잔인한 현실에 겨우 찾은 희망을 잃기도 한다.
 
연극이 끝나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깊은 여운이었다. ‘내 꿈도 저 강 너머에서나 이룰 수 있을까?’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삶은 예측할 수 없기에 비극이지만 끝을 모르기에 희극이다. 다만, 비극적 결말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조지가 이제는 생겨나지 않기를, 착하고 순수한 레니도 꿈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온 마음으로 바랐다.

 
   탕. 한 남자가 쓰러진다. 혼자 남은 남자는 울음을 삼키며 뒤돌아 붉은 하늘을 바라본다. 텅 빈 하늘에 홀로 비친 그림자가 몹시도 적막하다.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땅을 가질 수 없다는 걸. 레니가 좋아하니까 계속 그 얘기를 해 주다가 내가 나한테 깜빡 속아 넘어간 거야. 정말 그 땅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한 달에 50달러를 벌면 그걸로 시내에 나가서 술이나 퍼 마시고 그냥 그렇게 사는 건데. 애초에 그 길밖에 없었던 건데... 그렇죠?”       

  


덧붙이는 말
   연극 <생쥐와 인간>은 원작 소설에 드러난 ‘대비’와 ‘절망’을 여러 장치를 사용해 표현해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레니’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타인벡의 소설에는 대비가 자주 나타난다. (거구에 힘이 센 ‘레니’의 이름은 ‘레니 스몰’이다.) 극에서는 영리한 조지와 어리숙한 레니를 연기한 배우의 체격이 명백히 대비를 이루었고, 1인 2역(컬리/슬림, 캔디/칼슨)을 한 배우들도 사전 정보 없이는 한 사람이 전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맡은 역할을 잘 소화해 주셨다. 또한 무대 바닥에 깔린 커피콩을 주고 받는 장면으로 조지와 레니가 서로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존재인지를 부각시켰다.
   라이브로 연주되는 음향도 인상깊다. 현악기의 울림과 피아노의 처연한 멜로디가 극의 비극을 더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조용한 가운데 오직 레니의 허밍으로 들려오는 멜로디도 관객을 더욱 몰입하게 한다. 무대와 소품, 음악에도 많은 고민을 담았음이 전해지는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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