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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사 Jul 31. 2023

평론가에게 요구되는 날카로움이란

신형철 평론가의 글을 애정하는 이유 <인생의 역사>

언제였더라. 한 인친 님께서 신형철 평론가의 진정성은 의심하지 않지만 그에게는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날카로움이 없다고 , 그의 문장이 가진 다정함을 애증 한다고 쓰신 글을 보았다. 인친 님의 견해를 존중한다.


그런데 난 그 다정함 때문에 그의 글을 애정하고, 그래서 애타게 기다렸다. 날카로움이 없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정확성 (그러고 보니 그의 저서 중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란 책도 있었지)도 일종의 날카로움이라 생각하는데 이동진 평론가만큼이나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하나의 사물이나 상황에 맞는 단어는 딱 하나뿐이다)에 부합하는 글을 쓰기 위해, 뜻한 바를 백 퍼센트 담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없다는 '날카로움'은 무엇일까? 문학작품의 추함과 악함, 모자람을 들추어 지적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혹평? 그렇다면 또 의문이 생긴다. 혹평이란 걸 해야만 좋은 비평가인가? 혹평받아 마땅한 문학에 대해서는 아예 글을 쓰지 않는다면 비평가로서 자격이 없는 것인가? 자질이 부족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혹평받을 게 99%인 작품에서 굳이 나머지 1%를 찾아 알린다면 그건 문제의 소지가 있겠으나 아예 함구하는 것, 그러니까 혹평하는 글 자체를 쓰지 않는 건 그의 자유 또는 소신이라고 본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다. 좋은 것만 보고, 그 감상평을 쓰고 나눌 시간도 부족한데 이미 내 시간을 허비해 버린 작품에 대해 글까지 쓰느라 또 인생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굳이…?


생각 없이 싸지르는 악플은 이미 차고 넘치고,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한 자 한 자 고심해 남기는 선플은 귀한 세상이다.


가끔 제삼자인 내 눈물까지 쏙 빼는,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선플을 볼 때가 있는데 신형철 평론가의 글이 그렇다. 세파에 상처투성이가 되었다면 그의 글을 꼭 만나보기를… 당신에게 필요한 문장을 만나리라 확신한다.


+ 덧붙임) 

이 글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형철 평론가의 평론관을 알게 되었다. 문학동네 완독챌린지 독파에 <인생의 역사> 완독 후기로 등록한 걸 직접 읽으시고 본인의 소신을 줌토크 때 밝혀주신 것.


실제로 비판적인 글은 잘 안 쓴다셨다. 요한 순간에 필요한 칭찬을 해주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고, 가급적이면 작품의 좋은 점을 많이 발견해 얘기해 줌으로써 그 작가가 더 좋은 작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평론가의 역할이라 생각하신다고 (대가는 예외라셨다. 그들에겐 '진짜 비판'이 필요하다 생각하기 때문), 그냥 좋은 소리 해서 두루두루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칭찬받은 사람은 실제로 더 열심히 써서 점점 더 잘 쓴다는 지론이었다.


어떠한가. 난 앞으로도 인류애 바닥 치는 순간마다 신형철 평론가의 글을 찾을 것 같다. 그의 다정함이, 따스함이 너무너무 좋으니까 #언제나그랬듯이




 "사랑은 세상이 고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사랑은 가치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다. "Amo:Volo utsis. (중략) 사랑합니다. 당신이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중략) '너는 이 세상에 있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아모볼로 우트 시스. 세상이 고통이어도 함께 살아내자고, 서로를 살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는 유일한 가치라고 말하는 네 개의 단어."-p.96, <인생의 역사>


덕분에 매일 밤 #윤상_Insensible(1998)

어느 순간부턴 '언제나 그랬듯이'만 반복재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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