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한 복판에서 20대들과 주권 행사
460 Park Ave 6th Fl, New York, NY 10022, 주 뉴욕 대한민국 총영사관 주소다. 문화원까지 분원 한 후 딱히 갈 일이 없었던 곳이었지만 지난 3월 27일 금요일, 제22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총선거 투표를 위해 이곳을 찾았다. 부활절을 앞둔 굳 프라이데이는 은행도 학교도 코스트코도 문 닫는 휴일이다. 나름 늦잠의 유혹을 걷어차고 부지런히 서둘렀지만 꼬마와 학생들은 벌써 와 아침 일찍 투표를 마친 상태였다.
"미국에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한...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김유림
"뉴욕에서 투표할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외국에 나오니 한 표가 더 소중하게 느껴졌어요."유지원
"뉴욕에서 재외국민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한 투표 참여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한국인으로서.. 소중한 기회와 앞으로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해 주었다고 생각해요." 최지우
나쁜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
약속한 10시에 늦지 않게 도착하기 위해 8시 버스를 타야 했다. 평소보다 늦게 오는 156 버스를 요란하게 손을 흔들어 세워 올라탔다. 휴일이라 그런지 기사님의 운전이 너무나 여유롭다. 강가를 끼고 약 1시간여를 달린 버스가 링컨 터널을 통과해 맨해튼 포트 어토리티 터미널에 내려준다. 소요 시간이 비슷한 걸 확인하고 지하철 대신 도보로 파트 애비뉴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따라 도로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쳐있고 경찰은 차량 통제 중이다. 역대급 막힘에 무슨 퍼레이드가 있냐고 물으니 '대통령 행사'때문이란다. 누구? 바이든? 하니 끄덕이며 라디오시티 홀에서 역대 대통령들이 모인 펀드레이징 행사가 있었다 한다. 검색해 보니 바이든이 대선 자금 모금 행사를 열었는데 오바마, 클린턴까지 총출동해 우리 돈으로 337억을 모았단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치의 계절이다.
2시간이나 걸려 헐레벌떡 온 거리에 비하면 투표는 비교적 간단했다. 영사관이 있는 건물 9층에 올라가니 문 앞에 두터운 후보자 인적 사항이 인쇄된 바인더가 놓여있다. 내 주민등록이 있는 지역을 골라 펼쳐보니 두 명의 후보자 이름이 적혀있다. 며칠 전 학생들에게 물었었다. "한 명은 좋은 사람이 아니고 한 명은 잘 모르는 사람이야. 어떡하지?" 학생들의 대답은 심플했다. "나쁜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낫죠!"
입장권은 재외국민 투표 등록
혹시나 싶어 갖고 간 여권 대신 미국에서 쓰는 운전면허증을 보여주니 미리 등록된 내 이름을 찾아낸다. 재외국민 선거는 한국처럼 당연직이 아니라 최소 두 달 여전 미리 등록해야 한다. 예년과 달리 홍보가 전혀 없어 영사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한참을 검색해 찾아내야 했다. 어렵게 서치 한 게 아까워 한국에서 온 학생들과 방문 연구자들에게도 링크를 전달했다. 지난 2월 설 명절에 한국에서 온 이들을 우리 집에 초대했었는데 이때 내건 조건은 딱 하나였다. 재외국민선거 등록 완료! 다행히 모두 조건을 충족해 줬고 이번 투표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여름에 만났던 배우 이선균
"유어 핸드폰 플래시, 래프트 라이트 쉐킷쉐킷, 오케이?"
작년 7월 뉴욕 링컨센터에서 코리아 아츠 위크가 열렸다. 뉴욕 밤하늘 아래 무대 위 크라잉넛은 '유창한' 영어와 퍼포먼스로 링컨센터 무대를 찢어 놓았다. <파칭코>의 이민진 작가가 후배 한인 작가들과 대화하는 시간도 있었다. 여름밤 야외에서 상영하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그 흡입력이 여전했고 KPop으로 채워진 사일런트 디스코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같은 장소에서 열린 뉴욕 아시안 필름 페스티벌은 한국 영화의 향연 같았다. 최근 개봉한 작품을 들고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 장항준 감독의 입담을 100% 알아듣고 외국 관객 사이에서 큭큭대고 있는 나 자신이 뿌듯하면서 낯설었다. 무엇보다 이 영화제의 처음과 끝은 이선균이었다. 그는 개막식과 폐막식을 빛내주는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최고의 스타였다. 그러나 평소에는 반바지에 편한 스니커즈로 링컨센터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스타로 관객으로 자유롭고 즐거워 보였던 이선균은 그로부터 석 달 뒤 마약 혐의로 뉴스에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연이은 '음성' 소식에 그럼 그렇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잠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음성인 마약을 대신해 그의 인생과 이미지와 인격과 존엄을 모욕하고 조롱하던 경찰. 검찰. 언론. 유튜브 속에서...
작년 여름 뉴욕의 햇빛 아래서 빛나던 배우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깊이 있는 연기로, 영원한 박동훈 부장으로 오랫동안 남아 우리 또래의 고민을 연기해 줄거라 생각했었다. 그 연기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세계적인 배우조차 온전히 제 목숨 부지하고 살 수 없는 곳, 그곳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란 사실이 무섭고 분하고 억울했다.
진인사 대파명
이번 재외선거 투표율은 62.8%로 역대 최고치란다. 14만 7989명 재외유권자 중 9만 2923명이 투표에 참여해 재외 투표가 첫 도입된 2012년 이래 최고란다. 아침 일찍 허드슨 강을 건너 대통령 행사로 꽉 막힌 맨해튼 도로를 가로질러 기어이 투표하고 온 미주지역 2만 6341명의 유권자 중 한 명으로서 조금 감격스러웠다. 뉴욕에서 귀한 한 표를 행사한 우리 MZ 세대들 유권자들도 투표의 감동과 효능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열심히 노오력하는 것 이상으로 나의 나라가 똑바로 제대로 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외국에서 더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외국에 사는 이들은 최선을 다했다. 이젠 한국의 유권자들 차례다. 사전투표가 이번 주부터 시작된단다. 진인사 대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