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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우진 Jun 29. 2021

딩동댕 지난 여름

29cm | 위클리 에세이 | 차우진의 <일과 마음의 사운드>

야외에서 일할 때가 있다. 굳이, 노트북이며 책이며 이것저것을 싸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언제부터 그런 걸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처음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였던 것 같다. 막상 회사를 그만두고 보니 막막했다. 뭣 하나 내 맘대로 되는 게 없었다. 출근을 안하니 동이 틀때까지 일할 때도 많았다. 버는 돈은 적고 4대 보험도 없었다. 그런데도 월세와 자동차 할부금을 갚아야 했다. 술 한 잔을 마시고 싶어도 통장 잔액을 계산했다. 남들은 아파트 청약을 넣느니마느니, 큰 회사로 이직을 하니마니 하는 삼십대 중반에 이게 뭐하는 건가 싶어서 한동안 우울했다. 


그러던 어느 평일 오후에 한강 공원에 가봤다. 와이파이도 없고 보조 배터리도 없던 시절, 2시간이면 방전되던 구식의 무거운 노트북을 켜고 잔디밭에 앉아 배터리 잔량을 보면서 다다다다 원고를 썼다. 원고를 다 쓰니 노트북도 꺼지고 해도 지고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아, 이거 좋네. 햇볕이 쨍하던 여름날.


크루앙빈은 텍사스 휴스턴에서 결성된 사이키델릭 밴드다. 전반적으로 기타 사운드가 희소해지는 글로벌 트렌드와 달리 매우 건조한 기타 사운드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미국 밴드지만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의 지역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음악을 만든다. 그만큼 다른 지역의 음악들을 ‘디깅(digging)’하는 팀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전 세계의 콘텐츠에 접속할 수 있는 지금, ‘디깅’이야말로 차별화된 역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이디어와 성실함, 무엇보다 열정이 없다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디깅에 최적화된 결과물이 <Late Night Tales> 시리즈다. 뮤지션이 직접 큐레이션한 음악으로 구성된 컴필레이션 앨범. 

크루앙빈이 셀렉한 곡들로 채워진 이 앨범은, 디깅에 진심인 밴드답게 브라질, 벨라루스, 나이지리아, 러시아, 일본 등의 싱글로 가득하다. 특이하게 혹은 놀랍게도 산울림의 “가지마오”가 실렸다. 불현듯 들리는 한국어의 신선함! 크루앙빈의 미공개 트랙인 “Summer Madness”도 수록되었는데, 쿨 앤 더 갱의 커버 버전이다. 원곡이 습도 높은 열대야의 끈적한 배경음악이라면 크루앙빈의 커버 버전은 드라이한 미국 서부의 한 여름 오후를 관통한다. 그러니까 미친 여름날, 그 어디쯤의 기억. 

매년 여름, 딱 이 맘때의 날씨가 되면 괜히 한강이나 어디 나무와 잔디와 사람들이 드글대는 곳으로 나가 일하고 싶어진다. 그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노트북을 챙긴다. 이제는 보조 배터리도 있고, 와이파이도 있고, 하다못해 데이터 무제한도 있으니 겁날 게 없다. 


크루앙빈의 바이닐을 챙기는 김에 휴대용 턴테이블도 챙긴다. 덮개는 미니 테이블 대신 쓸 수도 있다. 커피 한 잔 챙겨왔으면 좋았을텐데 깜박. 헐렁한 스니커즈를 벗어두고 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고 휴대용 테이블을 무릎에 올리고 마감을 하는데, 집중이 잘 안된다. 오케이, 그럴 줄 알았어. 몇 자 적다가 그만두고 책을 꺼낸다. 이럴려고 가져왔지. 여름날의 풍경을 담은 사진집. 

사진만 봐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백신 접종이 끝나면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해외 휴양지의 바닷가에 앉아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있을까. 공항 면세점에서 근사한 선글라스를 살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턴테이블에서는 이국적인 음악이 슬금슬금 흘러나온다. 이 곡을 셀렉하는 멤버들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는 잔디밭에 앉아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간질이는 머리칼을 넘기며 여름에 대한 글을 쓴다. 잘 써지지 않는다. 여름은 원래 그런 계절이라고 쓴다. 턴테이블의 바늘은 다음 트랙으로 넘어가고, 오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노트북의 배터리가 꺼질까봐 조마조마할 필요없는 2021년의 여름, 내년에는 오늘이 느슨한 바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딩동댕 지난 여름, 우리는 마감을 미룬 채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네.


https://post.29cm.co.kr/1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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