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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우진 May 14. 2021

'매우' 살아있는 여자들

강신재 소설집 <해방촌 가는 길>

1950년대, 특히 전쟁 후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거기엔 운명적이라고 할 만한 불가해한 상황 속에 놓인 인물들의 기쁨과 슬픔이 있다. 어릴 때는 그러한 시대의 기운에 좌절한 지식인들, 주로 남자들의 절망을 동경했다. 품어선 안되는 욕망을 욕망하는 자들의 실패와 몰락을 사랑했다. 그 감정이 조용하게 격정적으로 충돌하는 기운을 좋아한다.


그런데 한편 내가 새삼 꽂히는 건 문장과 대사에서 오롯이 드러나는 그 시대의 말투다. 그러니까 ‘해보았다’ ‘언제 한 번 보아’ ‘좋지 못했는데’ ‘읽어 봐두 괜찮아’ ‘춥지 않어?’ ‘찬성을 해 주었는데’ 처럼 굳이 줄여쓰지 않는 말투. 이런 문장을 읽고 있으면 호흡이 한 템포 느려지면서 상대방의 눈치를 유심히 살피는 듯한 기분이 된다. 이 긴장 상태가 좋다.


강신재의 소설을 처음 읽을 때도 이 부분이 특히 좋았다. 그런데 그의 글을 읽을수록 빠져드는 것은 주인공이 되는 여성들의 힘찬 기운이다. 그의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들은 도대체 빠져나갈 구멍이라곤 보이지 않는 가난,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되는 금기, 정체불명의 비극적 관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관계와 역할 따위에 결코 잡아먹히지 않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여기에 나오는 남자들이 어찌나 한결같이 비극의 주인공처럼 우울하고 거추장스럽게 안쓰러운지. 어떤 상황에도 기운을 차리는 여자들과 비교할 때 저 비장한 기운이 얼마나 하찮게 보이는지 말이다. 그리고 다시금, 내가 저 시절의 남자 지식인들에게 품은 연정이란 기껏 남성 중심 서사의 핵심인 나르시시즘의 부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반성과 동경이란 점에서, 강신재의 여자들은 ‘매우’ 살아있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이야말로 피할 수 없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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