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cm | 위클리 에세이 | 차우진의 <일과 마음의 사운드>
식구가 아팠다. 내 식구는 10살 된 고양이 봉수다. 나이도 많고 덩치가 크지만(10kg) 나름 건강에 큰 문제는 없어서 그동안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다리가 풀리고 잘 걷지를 못하는 거다. 급히 병원에 가서 MRI를 찍고 입원을 했는데, 일주일이 지나서도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매일을 마음을 졸였는데 원인을 알 수 없다니,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지만 더 할 게 없어 집으로 데려왔다.
한 번이라도 식구가 아파본 사람들은 이 마음을 알 것이다. 아픈 것도 문제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절망적이다. 엄마를 위해, 아빠를 위해, 형, 누나, 동생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바로 거기가 슬픔의 자리가 된다.
집에 돌아온 봉수는 먹지도, 울지도 않았다. 말 많고 커다란 고양이가 갑자기 오래된 화분처럼 생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일주일을 기다리니 그제서야 밥을 먹고 말을 좀 붙였다. 병원에 가기 전처럼 침대에 올라와 곁에서 잠들었다. 불편한 다리는 다소 부자연스럽긴 해도 많이 나아졌다. 그 일주일 동안 나는 러그와 계단과 이유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위해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는 필라델피아에서 활동하던 밴드 리틀 빅 리그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았던 미셸 자우너의 솔로 프로젝트였다. 이름 때문에 일본계라는 오해를 받지만, 미셸은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한국계 미국인이다. 뮤직비디오와 음악에 한국적인 요소들도 대거 등장한다. 이름을 이렇게 지은 까닭에 대해 미셸은 큰 의미는 없다고 말했지만, 덕분에 한국에 사는 우리들도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이 음악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요컨대 ‘정체성’이란 받아들이는 쪽의 문제가 아니다. 오직 스스로 말하는 쪽의 문제인 것이다. ‘재패니즈’라는 단어가 미셸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건 아니라는 점, 그게 바로 핵심이다.
지난 2014년, 미셸은 한국인인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필라델피아를 떠나 어머니가 살고 있던 오레곤주의 유진으로 돌아왔다. 미셸의 어머니는 그로부터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만든 곡들을 담은 앨범이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데뷔 앨범 [Psychopomp]이다. 뜻은 ‘저승사자’다. 앨범 커버는 젊은 시절 그의 어머니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썼다. 매우 세련되고 자유로운 젊은 여성의 얼굴이 커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앨범 제목과 함께 보면 좀 복잡한 마음이 되는 게 사실이다. 아마 복잡한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미셸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필라델피아나 뉴욕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고 한다. 거기서 새로 직업을 구하고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앨범이 그의 삶을 바꿨다. 혹은 일의 방향을 바꿨다. 다수의 레이블이 이 앨범을 주목했고,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에서 쇼케이스를 연 뒤에는 다수의 매체들이 리뷰를 썼다. 그는 대번에 주목할 만한 인디 록 음악가가 되었다. 불과 몇 달 만에 세계 시장으로 데뷔했고, 덕분에 나도 이 음악을 듣게 되었다. 가족의 죽음이 역설적으로 미셸에게 새로운 밴드, 새로운 음악, 새로운 일을 제안하면서 삶의 ‘넥스트 챕터’로 넘어갈 수 있게 해준 셈이다.
얼마 전부터 봉수는 거의 정상적인 일상을 보내고 있다. 눈에 띄게 살이 빠졌지만, 덕분에 조금 가볍게 움직이는 것 같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사료통 앞에서 시끄럽게 울어대고, 컴퓨터 앞에서 일할 준비를 하고 있으면 잠자러 가자고 또 시끄럽게 울어댄다. ‘안돼, 일해야 해.’라고 말하고 몇 번 쓰다듬어준 다음 모른 채 하고 있으면 곁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자기 침대로 가서 잠이 든다. 나는 일을 하다가, 새벽 어느 시간대에 조심하며 봉수가 잠든 모습을 훔쳐본다. 어느 정도는 안심이 되고 어느 정도는 걱정도 된다. 나는, 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족, 가정, 식구… 함께 사는 존재를 일컫는 말. 나는 가족보다는 식구라는 말을 조금 더 좋아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것보다 그저 함께 밥 먹는 사이. 애초에 함께 살던 고양이는 봉수 하나가 아니었다. 하울이라는 고양이가 하나 더 있었다. 나는 2년 전에 그를 잃었다. 늙고 병든 고양이는 내 곁에서 세상을 떠났다. 봉수와 달리 작고 가벼운 고양이였던 하울이는 창밖을 보는 걸 좋아하고, 산책도 좋아했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 그의 사진을 두고 가끔 바라본다. 하울이가 세상을 떠난 뒤 봉수는 좀 더 말이 많아졌고 어리광도 더 부리는 크고 무거운 고양이가 되었다.
이 생각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써야 할 글을 쓰고, 해야 할 일을 한다.
마침 여성가족부는 2021년 4월 27일, 가족 범위에 대한 법 규정을 삭제하고 비혼 동거도 가족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 개선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자녀의 성도 부모 협의로 정하게끔 바뀌게 된다. 비혼 출산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논의하기로 했다. 1인 가구, 2인 가구뿐 아니라 비혼, 동거, 동성혼, 다자연애 등 다양한 방식의 관계가 출현하는 요즘, 가족이란 좀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재정의되고 있는 셈이다. 국민 10명 중 7명은 생계나 주거를 공유하면 결혼/혈연이 아니어도 '가족'이라고 여긴다는 설문 결과도 있다.
그러면 다시, 함께 산다는 것. 식구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과정이 아닐까. 나는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고, 그러다가 잠든 너를 보러 가고, 너의 건강과 식사를 걱정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너는 곁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종종 내 발등에 코를 비비고, 푹신한 침대에서 쿨쿨 잠든 모습을 보여주고. 바로 이게 봉수와 내가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우리보다 먼저 떠난 하울이를 기억하면서, 각자의 시간을 할애하고, 그러는 동안 너와 내가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그런 삶. 식구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