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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우진 Apr 05. 2021

시작하는 마음

29cm | 위클리 에세이

얼마 전부터 뉴스레터를 시작했다. 토요일 오전과 일요일 밤마다 음악과 콘텐츠 업계의 소식을 공유하는 내용이다. 사실은 몇 년 전부터 꽤 오랫동안 고민했음에도 이제야 시작할 수 있었다. 더 미루면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올해의 목표도 정할 수 있었다. 


It’s better late than never.

안하는 것보다 늦게 하는 게 훨씬 낫다는 말이다. 새해 계획이라는 게 그렇듯,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이나 글로 꺼내고 나면 그게 제 나름의 실체를 가지고 움직이는 법이다. 이 말도 마찬가지다. 페이스북 프로필에 적고, 사람들에게 거듭 말하다보니 제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 저 문장이 계속 말을 건다. 


뉴스레터의 구독자가 조금씩, 꾸준히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이런저런 책을 읽는다. 이제껏 해보지 않은 일들이다. 그리고 시작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을 떠올린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일’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일을 왜 할까, 아니 그보다 먼저 도대체 일이란 무엇인가.

수프얀 스티븐스의 앨범을 듣는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히트와 함께 덩달아 유명해진 싱어송라이터. 그런데 대략 20여 년 간 그의 음악을 들었던 나로서는 이 성공은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다. "Mystery of Love"는 여전히 좋은 곡이다. 늦은 겨울의 살얼음처럼 아슬아슬한 투명함과 연약한 아름다움이 감싸는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언젠가 놓쳐버린 인연이 새삼 떠오르듯 마음이 울렁댄다. 가벼운 우울과 슬픔이 찬 바람처럼 스치는 음악을 듣는 일은 늘 오래 기억할 만한 순간을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인지 "Mystery of Love"는 여전히 라디오 신청곡과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채우고 있지만 뭐랄까, 높은 완성도와 극찬에 가까운 호평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Michigan](2003)과 [Illinois](2005)를 떠올리게 되는 건 별 수 없다.


그 사이 수프얀 스티븐스는 머물진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멀리 나아간다. 거의 20년 전, [Michigan]과 [Illinois]를 발표했을 때 그는 미국 50개 주를 테마로 앨범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1년에 한 장씩 발표해도 50년이 걸리는 프로젝트라서 당연히 이뤄지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The Ascension]를 듣고 있으면 새삼 큰 방향에서 ‘50주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50주 프로젝트’는 사실 ‘미국’이라는 테마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The Ascension]은 미국에 대한 음악적 보고서, 그리고 수프얀 스티븐스는 애초에 자신이 이뤄내고 싶던 ‘일’을 다른 방식으로 완수하고 있는 셈이다.  

Sufjan Stevens - The Ascension (2020)

그리고 하필 나는 이 앨범을 들으면서 음악가의 ‘일’에 대해 불현듯 깨닫는다. 음악가 뿐 아니라 우리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해야만 하는 임무로서의 일이 아니라, 내가 삶을 통해 지속하기로 결심한 무엇, 일종의 소명 같은 일. 이러한 깨달음은 또 자연스레 내가 하는 일을 겨누고 만다.

지난 1년 간, 어쩌면 몇 년 간 나는 늘 내가 하는 일을 정의하려고 애썼다.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 정확히 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면서부터였다. 글을 씁니다, 음악에 대한 글을 씁니다, 콘텐츠를 만들어요, 기획을 합니다, 인터뷰를 합니다, 파워블로거에요, 반백수입니다 등등. 이 모든 대답이 나의 일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지만, 뭐라고 불리던 상관없다고 생각하던 나는 포춘쿠키를 파사삭 부서뜨려 속에 든 메모지를 꺼내듯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설명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리가... 나의 일을 정확히 정의하는 것은 나를 똑바로 이해하는 일이란 걸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이해하는 일 그리고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가늠하는 일, 나 자신에게 누구보다 정직해지는 일은 놀랍게도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요컨대 나를 잘 설명할 수 있는 한 마디를 찾는 것은, 내게 더욱 바짝 다가가는 일. 

그럴려면 일단 내게 시간을 충분히 줘야 한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나는 매일 한 두 시간을 작정하고 나 자신에게 쓰기로 했다. 때론 40분만, 20분만 몰입하고 빠져나오는 훈련도 필요했다. 그때에는 타이머도 유용하다. 스스로에게 충분히 몰입할 시간을 주고, 그동안 아무 것도 나를 방해하게 내버려두지 말 것.


그렇게 음악을 멈추고 말도 지워버린 자리에서 가만히 책을 읽고 메모를 하고 일기를 썼다. 물론 잘 안 되었다. 문장은 추상적이고 감정은 막연했다. 정체불명의 메스꺼움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나는 내가 나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나와 만나려는 시도는 종종 실패했다. 귀찮고 짜증도 났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는 걸 알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일과 삶이 분리되기는 커녕 딱 붙어 있어야 편안해진다. 그게 나다. 


덕분에 몇 가지를 새로 배웠다. 


나에게 시간을 줄 것. 향에 불을 붙이고 그것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정도의 시간. 정리되지 않은 생각으로 머리와 마음이 복잡해도 내버려둘 것. 그러다보면 불현듯 어떤 문장이, 한 단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게 우리를 구할 것이다. 


또한 읽기를 게을리 말 것. 무엇보다 어떤 책이든, 텍스트든, 무엇이든 읽을 것. 나는 ‘쓰는 사람’이고 쓰기란 결국 ‘읽는 것’에서 시작된다. 쓸데없이 아름다운 물건을 책에 올려두고,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묵직한 것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 또한 나름의 읽기라는 걸 안다. 


그러므로 새삼 ‘시작하는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일종의 일로서 무언가를 시작하는 마음. 다시말해 ‘자, 그럼 뭐든 이제 좀 시작해볼까?’라고 막연하게 눙치는 대신 이제 무엇을 하고, 어떤 식으로 하고, 그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얻고 어떻게 내가 달라질 것인지 살피고 계획하는 일. 수프얀 스티븐스도 그랬을 거다.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하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은 그게 어떻게 이해되어도, 때론 오해를 받아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미국’이야말로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할 대상이자,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이해하기로 마음 먹은 소재였으므로 더더군다나. 

왜 이 일을 하는가. 우리는 필연적으로 한 번은 이 질문과 만난다. 그때 바쁘다고 핑계를 대거나, 적당한 말로 둘러대지 말 것. 그렇게 도망치지 말 것. 내게 일이란 오랫동안 ‘쳐내야만 하는 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가 뭐라고 하든 스스로가 정확히 그것을 정의해야한다는 걸 안다. 


누구든 일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거기엔 시간이 걸린다. 이걸 이해하는데 오래 걸렸다.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고 정의하기로 마음먹었다. 써야할 원고 탓을 하거나 진행하기로 한 프로젝트의 마감을 이유로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올해의 나는 해보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 해보지 않은 일을 모두 해낼 것이다. 그렇게 언젠가 후회할 여지도 남기지 않기로 한다. 그러니까 역시나 ‘It’s better late than never.’ 이렇게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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