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가 된 미군 고문단 장교
우리나라에서는 “사무라이”라면 대체로 무사(武士)를 뜻하는 의미로 알고 있다. 이것은 반쯤은 맞는 말이다. 우리는 무사라 하면 옛 시대에 칼이나 창, 활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무사”라면 두 가지 뜻이 있다. 우리와 같이 무기를 사용하여 무력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물론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사회적 계급”으로서 무사라는 말이 대부분 사용된다. 이때의 무사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양반”이라는 말과 가까운 의미이다.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막부에 의한 정치가 계속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와는 다른 권력구조를 가지고 있다. 천황은 형식적으로는 일본의 제1인자이지만, 정치적 실권은 전혀 없었다. 천황을 보좌하는 신하들은 화족(華族)이라 하여 귀족 가문이다. 천황과 화족들은 정치에 전혀 간여할 수 없었다. 일본을 실제로 통치한 세력은 막부와 각 번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무사 계급이다. 최고 권력자인 도쿠가와 가문은 물론, 그 아래 신하들도 모두 무사계급이다. 실제로 이들이 무예를 닦고 있던 아니던 그건 관계가 없다. 신분으로서의 무사이다.
일본의 막부체제는 일종의 연방제로 볼 수 있다. 연방권력의 최우두머리는 쇼군(將軍)이며, 각 지역은 영주들이 다스린다. 막부는 중앙정부, 지역의 번은 지방정부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관리들, 즉 공무원이 필요하다. 이들 공무원이 바로 “사무라이”(恃)인 것이다. 사무라이는 당연히 무사 계급이다.
여러 사정으로 공무원 직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칼을 잘 써도 사무라이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낭인”(浪人, 로닌)이다. 낭인이라면 우리는 칼 한 자루를 손에 들고 전국을 떠도는 사람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렇지는 않다. 낭인의 생활은 정말 비참하다. 사무라이들은 원래 할 줄 아는 것은 칼 쓰는 것과 공무원으로서의 일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먹고 살 재주가 없다. 농사도 지을 줄 모르고, 장사도 할 줄 모른다. 당연히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아내는 근근이 입에 풀칠할 만한 일을 얻거나, 창가로 나가기도 한다. 아이들도 돌봐줄 사람이 없다. 당사자는 고향에 있을 수 없어 고향을 떠나 동가식서가숙으로 빌어먹고 다니는 수밖에 없다.
일본은 과거 우리나라보다 훨씬 지독한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일본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신분의 순서를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구분하였다. 계급 가운데 제일 위에 있는 ‘사’(士)가 우리는 선비를 의미하지만, 일본에서는 무사를 뜻한다.
일본문화, 그중에서도 특히 무사도(武士道)는 서양인들에게 있어 신비와 로망의 대상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가끔 무사도를 소재로 한 서양영화가 가끔 보이는데, 그중에서는 아예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있다. 이전에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쇼군>이 그러한 영화이며, 오늘 소개하는 <라스트 사무라이>(The Last Samurai) 역시 미국이 제작한 사무라이 영화이다. 이 영화는 2003년에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미국 남북전쟁 참전 경력이 있는 베테랑 미군 장교가 일본에 군사고문으로 와서 일본의 내란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물론 실화가 아닌 가공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보신 전쟁(戊辰戦争) 등 역사적 사건에 영감을 받아 이 영화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주인공인 톰 크루즈가 맡은 주인공 알그렌 역은 보신 전쟁에서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와 함께 싸운 프랑스 육군대위 줄 브류네와 중국에서 상승군(常勝軍)을 결성하여 서양화에 공헌한 미국인 용병 프리데릭 타운젠트 등의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 영화는 흥행면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아카데미상 4개 부문, 골든글러브상 3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오랜 전통을 가진 일본에서 막부 말기 전통을 깨부수려는 근대화가 시작되어, 건국 이래 검을 믿어온 자와 새로운 전투양식인 총과 군대에 희망을 거는 자들로 일본은 둘로 쪼개졌다.
미국 남북전쟁. 북군 장교인 네이선 알그레인 대위(톰 크루즈 분)는 남군과 인디언들을 상대로 싸운다. 전쟁의 와중에서 알그렌은 지휘관인 버클리의 명령을 받아 전쟁과 관계없는 무저항의 인디언 부족에 공격을 가해 남녀노소 관계없이 무자비한 학살을 가한다. 비록 상관의 명령이라고는 하나 양심의 가책에 번민하던 알그렌은 악몽에 시달리게 되어, 마침내는 군에서 제대한다.
제대 후 생활고를 겪고 있는 알그렌에게 일본의 사업가이자 장관인 오무라로부터 벤저민 버클리 대령을 통해 전쟁영웅을 군대 교관으로 채용하고 싶다는 제안이 들어온다. 그 무렵 일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끝나 근대 국가를 향해 급속한 근대적 군비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알그렌은 막대한 보수에 끌려 그 제안에 응한다.
한편 일본에서는 신정부의 그러한 움직임에 불만을 품은 무사들이 카츠모토(勝元)의 지휘에 따라 철도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본 신정부는 카츠모토를 토벌하기 위해 알그렌이 교육을 시키고 있는 군대를 출동시키라고 명령한다. 알그렌은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항변하지만, 정부는 명령을 거두어들이지 않는다. 결국 전투에 나섰지만, 카츠모토가 이끄는 반란군의 반격을 받아 정부군은 뿔뿔이 흩어지고, 알그렌은 혼자 분전하다가 카츠모토 군에 의해 사로잡힌다.
카츠모토는 알그렌을 죽이지 않고 여동생 다카에게 그를 돌보게 한다. 다카의 남편은 지난 전투에서 알그렌에게 죽었다. 알그렌은 악몽에 시달리지만, 반란군의 마을에서 차츰 안정을 찾아간다. 마을에서는 반란군들이 검술 수련을 하고 있다. 알그렌이 자신도 한번 해보겠다고 나서지만, 사무라이 리더인 우지오(氏尾)에게 손 쓸 틈도 없이 완패당한다. 이곳에 눌러살면서 알그렌은 차츰 반란군의 사무라이 정신에 매료된다. 카츠모토는 처음에는 적을 알기 위해 알그렌을 살려 두었지만, 차츰 그에게 무언가 모를 끌림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도 차츰 알그렌에게 마음을 열어준다. 알그렌은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다카에게 자신이 그녀의 남편을 죽인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다카도 이를 받아들인다.
검술 훈련과 웃음이 넘치는 생활 속에서 알그렌은 점차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 대해 경외의 마음을 표시한다. 마을 사람들도 점차 알그렌을 신뢰하기 시작한다. 그런 가운데 마을에서 마츠리(축제)가 벌어진다. 평소에는 늘 근엄한 모습을 보이던 마을의 리더 카츠모토도 이날 만은 우스꽝스러운 광대 연기를 하며 흥이 절정에 다다른다. 이를 틈타 오무라가 보낸 자객들이 몰래 마을을 습격해 온다. 알그렌과 카츠모토, 그리고 마을사람들은 힘을 합에 이들을 격퇴한다. 드디어 알그렌도 이들과 한 편이 되었다.
봄이 되었다. 카츠모토는 정부로부터 부름을 받아 도쿄로 향했다. 알그렌도 카츠모토와 동행하였다. 카츠모토는 도쿄에서 이미 충분히 훈련받고 무기도 충분히 갖춘 충실해진 정부군을 확인한다. 오무라가 알그렌을 제거하기 위해 자객을 보내나, 알그렌은 그동안 수련한 검술로 그들을 물리친다.
카츠모토는 메이지 천황 앞으로 불려 나간다. 카츠모토는 이전에 천황의 스승이었으며, 최고위 관리이기도 하였다. 카츠모토는 일본 정부 관료의 공식 복장인 서양식 양복 대신에 일본 전통의 옷을 입고, 칼을 찬 채로 천황 앞으로 간다. 그 모습을 본 오무라는 이미 폐도령(廢刀令)이 내려 칼을 차는 것은 불법이니, 칼을 내려놓으라 한다. 그러자 카츠모토는 천황만이 자신에게 명령을 할 수 있다며, 천황의 생각을 묻는다. 그러나 지금 정부는 오무라의 세상이며, 천황조차도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천황은 오무라의 눈길을 피해버린다. 칼을 버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카츠모토는 도쿄에서 근신 명령을 받게 되며, 오무라는 카츠모토에게 자결을 강요한다.
알그렌은 반군에 대한 토벌군의 지휘관이 되어 달라는 오무라의 제안을 거절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그러다가 오무라가 보낸 자객의 습격을 받게 되는데, 알그렌은 이들을 퇴치한다. 그 후 카츠모토의 아들 노부타다를 비롯한 마을의 무사들과 함께 도쿄를 탈출하여 마을로 돌아간다. 더 이상 정부군과 카츠모토가 이끄는 반군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마을로 돌아온 알그렌은 반란군의 일원으로서 오무라와 버클리 대령이 이끄는 정부군과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다카는 알그렌에게 죽은 남편의 갑옷을 주면서 입으라고 한다. 붉은색의 갑옷을 입은 알그렌은 무사들과 함께 전장으로 향한다. 정부군은 카츠모토에게 항복을 권고하지만, 카츠모토는 거절한다. 드디어 전면전이 벌어졌다. 잘 훈련된 데다 대포까지 갖춘 정부군이었지만, 용감한 반군 앞에서 패배한다.
기세가 오른 반군은 말을 타고 대공격에 나서지만, 기마대는 캐틀링 기관총에 의해 저지된다. 반란군은 알그렌과 카츠모토를 남겨두고 거의 전멸당한다. 치명상을 입은 카츠모토는 자신의 목숨은 오직 칼만이 끊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젠 스스로 자결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알그렌에게 자신을 베어달라고 부탁한다. 카츠모토는 알그렌의 등 뒤에 핀 벚꽃을 보면서 “모든 게 퍼펙트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알그렌의 칼에 죽는다. 반군은 모두 전멸하고 알그렌만 남았다.
오무로는 남은 알그렌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지만, 정부군 병사들은 카츠모토의 죽음에 경의를 표하며 모두 무릎을 꿇고는 절을 올린다. 유신 이후 잃어버린 “무사도 정신”을 정부군 모두가 돌이켜 보게 된 순간이다.
살아남은 알그렌은 메이지 천황을 알현하였다. 거기서 그는 천황에게 가츠모토의 살아온 모습을 이야기해 주고 카츠모토의 검을 건네준다. 그것을 받은 천황은 카츠모토의 칼과 그의 가르침을 깨닫고, 얼마 전 체결한 미국과의 계약을 파기해 버린다. 오무라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격노하지만, 천황은 말에 꼼짝없이 눌려버린다. 천황은 알그렌에게 카츠모토의 “죽는 모습”을 물었다. 올글렌은 카츠모토의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고, 그의 유지를 전한다. 그것은 일본이 진정으로 근대국가로 태어나기 위한 카츠모토로부터의 메시지였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무사도의 정신을 잘 표현하였다고 극찬하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과도하게 미화된 판타지에 불과하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무사도의 정신은 이야기 속의 환상으로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서로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순진한 하급무사들 가운데는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카츠모토와 같은 정치적 거물이 이러한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을 일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