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를 배우기 싫은 이유 : 워라밸의 경계
자꾸 팀장이 골프를 배우라고 한다. 처음에는 좋은 취미라서 권유하는 건가 싶었는데, 점점 듣다 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만약 내가 골프를 배우면 자신이 머리를 올려주겠다(첫 라운딩을 뜻하는 골프 관용어인데 성차별적 표현이라 한다)는 둥 이런 날씨에 같이 휴가 내고 치러 가면 좋겠다는 둥 거래처랑 관계에도 골프가 좋다는 둥 결국 자기와 함께 골프를 치러 다니자는 거였다. 매번 완곡히 거절하다가 어느 날 또다시 내 옆에 와서 이 과장이 골프 치면 잘 칠 것 같은데 하면서 골프를 배우라 하길래,
“제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골프를 배우지 않은 거예요.”
라고 그만 대꾸해 버렸다.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골프를 배웠으면 큰일 날 뻔했다. 만약 내가 골프를 배웠다면 틀림없이 주말에도 팀장, 부장, 거래처와 골프를 치러 다니고 심지어 휴가를 내고 그들과 함께할 뻔한 것이다.(소름) 주말도 반납하고 휴가에조차 일할 뻔했다. 진심 다행이다. 골프를 안 배워서.
골프는 장점이 많은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그 특성상 업무의 연장선상으로 활용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워라밸을 무너뜨리는 운동이다. 일과 놀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업무적으로 얽힌 사람이나 상사가 같이 가자 했을 때 매번 거절할 멘트를 고민하거나 결국 한 번씩 따라다녀야 하는 사태를 생각하니 골프를 배울 마음이 쏙 들어가고 만다.
사실 골프를 배울 타이밍이 있었다. 흥미도 있었다. 원래 새로운 취미를 갖는 걸 좋아하는 편이고 모두의 골프 등 게임으로 단련된 골프 지식이 있었다.(훗)
하지만 그 시기 나에겐 어린 아이가 있었고 나는 주말을 희생해야 하는 운동은 배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시절 골프를 배우지 않은 대신 매 주말 아이와 인생에서 다시는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을 잔뜩 쌓았다. 그 사실에 감사한다.
지금은? 아이가 조금은 커서 배울 수도 있겠지만 그다지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일단 퇴근 후나 주말에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취미생활로 바쁘다. 아직 밀려 있는 책, 만화, 영화, 드라마, 신작 애니메이션도 봐야 하고, 밀린 게임도 해야 하고, 아이와 여행도 가야 하고 보드게임과 방탈출도 해야 한다. 박물관도 가고 미술관도 가고 거기에 더 시간이 있으면 기타도 배워야 하고 보컬 수업도 듣고 싶고 필라테스나 요가, 헬스 같은 운동도 해야 하고 이렇게 브런치에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소설도 짬짬이 써야 하고 틈틈이 정리해서 공모전에 도전도 해야 한다. 도무지 골프까지 칠 여유가 없다. 취미 부자는 바쁘다. 골프를 쳤다면 대체 이중 어떤 취미를 포기했어야 했을까.
그래서 생각한다. 골프를 안 쳐서 정말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