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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미 Sep 28. 2023

우울증에 이인증

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42

우울증, 불안장애, 불면증은 거의 평생 동안 스트레이를 괴롭혀 왔다. 어떤 때는 좀 낫고, 어떤 때는 심하게 나빴다.


어떤 좋은 일을 계기로 스트레이의 상태가 몇 달 동안 마치 기적처럼 호전된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우울한 날들은 여전히 예고 없이 가끔씩 찾아왔기 때문에 완치되었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시간 동안 스트레이의 정서는 안정되어 있었다.


일단 생활부터가 달라졌다. 우울증의 증상인 무기력이 사라진 덕분에 매일 운동을 하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주변 사람들을 만났다. 술이나 수면유도제에 의지하지 않고도 쉽게 잠이 들었고 도중에 이유 없이 깨지 않았다.


그리고 일상생활보다도 더 큰 변화가 내면에서 일어났다.


- 오늘 동생이랑 같이 엄마를 만났어. 엄마를 좋아할 필요는 없지만, 계속 미워하는 건 그만두고 싶어.


평소에는 어머니를 언급하는 일조차 피하던 스트레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크게 놀랐다. 자신에게 그렇게나 큰 고통을 주었던, 입에 올리기도 싫어하던 지난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포용할 힘. 우울증에서 놓여났을 때 스트레이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행복한 삶으로 스스로를 이끌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벌써 오래 전 일이다. 깊은 우울증과 불안장애는 다시 찾아왔다.


스트레이는 반년 넘게 치료를 받지 않고 버텼다. 고집 센 성격 탓도 있었고, 어려움이 생기면 도움을 구하기보다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 하는 삶의 방식 탓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치료에 대해 좋은 기억이 없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항우울제 복용을 시작했을 때 한동안 효과는 보지 못하고 부작용만 겪는다. 부작용의 종류와 강도에는 개인차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기간을 견뎌내고 효과를 보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견뎌낸 후에도 효과를 보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부작용이 너무 심해서, 또는 부작용을 견딘 후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어서 도중에 그만둔다. 


스트레이는 살면서 항우울제를 처방받은 적이 몇 번 있지만 매번 오래 복용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다양한 부작용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싶은 부작용도 있었다. 반대로 불면증이 더욱 심해지는 부작용도 있었다. 가장 위험했던 부작용은 자살 충동이 치료 전보다도 더 심해지는 것이었다. 청소년과 젊은 성인의 경우, 자살 충동은 역설적이게도 항우울제 치료 초기의 흔한 부작용이다. 우울증을 치료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살의 가능성인데, 처음에는 그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스트레이는 이번에는 가능한 한 항우울제를 피하면서 우울증을 관리해 보려고 했다. 그 노력 중 하나로 생활습관을 바꿔 보기도 했다. 원래 건강했던 몸은 스스로도 실감할 만큼 더 건강해졌지만 우울증은 낫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계속해서 약물치료를 권했다. 조금 더 견뎌 보던 스트레이는 결국 정신과를 찾아갔다. 더 이상 이렇게 우울 속에서 살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스트레이의 친구들 중에서도 약물치료를 가장 강력하게 권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스트레이가 치료를 받기 시작했을 때 가장 기뻐했고, 효과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곧바로 내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다.


항우울제 요법을 시작하자마자 스트레이에게는 이인증depersonalization이 찾아왔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병, 자신이 실제로 겪고 있는 일들이 마치 영화를 보듯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병이다. 하루 종일 멍하고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유일한 운동으로 남았던 자전거 타기조차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이인증이 일어나고 있음을 자각할 때마다 극도의 불안을 느껴서 불안장애도 더 심해졌다.


의사와 스트레이는 모두 이인증이 항우울제의 부작용이라고 생각했다. 항우울제를 계속 복용하다 보면 부작용이 저절로 사라지고 약효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스트레이는 한 달 정도 계속 복용했다. 한 달 동안 우울증은 약간 나았지만 이인증은 지속되었다. 다른 항우울제로 바꿔 봤지만 별로 나아진 점은 없었고, 이유 없이 화가 나는 부작용만 추가되었다. 그 다음에는 항우울제를 한동안 완전히 끊어 봤다. 이인증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 자체로 새로 시작된 병이었던 것이다. 항우울제가 방아쇠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항우울제를 끊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결국 항우울제와 이인증 치료제를 함께 사용하기로 했다.


스트레이의 우울증은 항상 과음과 함께 돌아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는 그저 술을 줄이도록 노력해 보라는 말만 했을 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술에 대한 스트레이의 의존은 그 자체가 독립된 문제라기보다는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였으니, 아마 우울증을 진정시키는 일이 먼저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알코올 중독 치료제는 기본적으로 쾌감을 차단하는 작용을 하는데, 이미 우울한 상태인 스트레이에게는 아마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항우울제라도 약물에 따라 금기사항이 조금씩 다르고, 스트레이가 처방받은 약은 음주가 특별히 금기사항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매일 밤 술을 마시면서 비슷한 시간대에 약을 복용하는 일이 100퍼센트 괜찮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비록 음주가 직접적인 금기가 아닌 경우라도 항우울제는 술과 함께 복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스트레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담치료도 시도해 봤다. 오래 전 무정부주의 코뮌에서 정신건강 모임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전문 상담가가 있는 모임이 아니었기 때문에 치료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 정식으로 상담을 받아 보기로 한 것은 나름대로 큰 결심이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가격만 비싸고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남에게 마음을 잘 열지 않고 평생을 살아온 스트레이에게, 아무리 전문가라고는 해도 아직 신뢰가 형성되지 않은 상대에게 속이야기를 털어놓는 일은 고역일 뿐이었다.


나는 그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썼다. 초안을 한창 쓰고 있을 때쯤 팬데믹이 일어났다.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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