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1 지금껏 설거지해 준 엄마에게 무한 감사를
이 이야기는 누군가의 소스와 누군가의 할 말이 더해진 픽션입니다.
수능이 끝난 어느 해 11월 넷째 주.
사고 싶은 건 많지만 돈이 궁했던 K군. 수험생에서 알바생으로 전직을 결심한다.
그동안 K군은 먹을 줄만 알았지 치울 줄은 몰랐다. 손에 소스가 살짝만 묻어도 오만가지 인상 쓰며 바로 씻어내기 바빴고 설거지는 늘 엄마의 몫이었다. '뭐, 이참에 습관도 들이고 돈도 벌고, 좋네!'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웨딩홀 뷔페장 알바. 며칠 후 K군은 깨달았다. 인생은.. 실전이었다.
대망의 알바 첫 날. K군은 왼쪽 가슴팍에 '빛나는 웨딩홀'이 박힌 빨간 카라티를 입고 바지춤에는 흰색 수건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식이 시작하면 뷔페장에 내려가 테이블마다 빈 접시를 치우기만 하면 된다는 매니저 형의 설명을 들었다. 그게 할 일의 전부라 했다. 저녁타임 첫 번째 결혼식이 막 시작하고 동시에 뷔페장에도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혼식을 다 보지 않고 미리 식당으로 내려와 밥부터 먹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은 K군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역시 밥의 민족인가. 지금껏 설거지 한 번 해보지 않았던 그는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을 손으로 주무르고 만지는 것이 생각보다 역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동안 너무나 따듯한 부모님의 온실 속에서 쑥쑥 자라왔음을 비로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럴 때마다 주급일을 생각하며 '이게 뭐! 별거 아냐!'라며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한 두어달 때쯤 지나니 좀 익숙해지는 것도 같았다. 빨리빨리 잘 치운다는 매니저 형의 칭찬이 기분 좋았던 K군은 그새 요령도 생겼다. 어느 테이블에 그릇이 나올지도 대충 눈에 보이다 보니 미리 그 테이블 근처를 알짱거리곤 했다. 마침 K군이 노리던 테이블에 접시가 어느 정도 비워졌고 슬슬 다가가려는 찰나, K군의 옆에 있던 테이블에서 K군 팔을 잡아챘다. "야, 이거 치워. 그리고 저기 가서 소주 1병만 꺼내와." 이미 얼굴이 붉어진 한 하객이었다. 모르는 사람, 모르는 어른들과는 이야기해 본 게 거의 난생처음인 K군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이 웨딩홀에서는 본인이 게임 속 배경처럼 존재하는 NPC 중 하나라 생각했고, 보통 하객들은 검은색 슈트를 입은 다른 형 누나들에게 말을 걸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말을 걸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K군은 그 자리에서 일시정지 당한 사람처럼 몸도 굳어져버렸다. "야 뭐 해. 빨리 안 가져와?" 한번 더 채근하는 아저씨를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은 표정으로만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이 새끼가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정색해? 어?" 술에 취해 붉어진 건지 열이 받아 붉어진 건지 목까지 빨개진 그 '어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K군의 왼쪽 가슴팍을 툭툭 밀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장내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갓 미성년자를 벗어난 K군과 '그 어른'에게로 쏠렸다. 접시 치우는 새끼한테 치우라고 했는데 그게 기분 나빠? 소주 가져오라는 게 그렇게 기분 나쁘냐고 어? 이게 어디서 어른을 노려봐? 왜 네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디?
K군의 맥박이 이렇게 빨리 뛴 적이 있었던가.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혼나는 것도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너무 두근대서 정신을 못 차렸었는데. 계속해서 아저씨의 말을 듣고만 있던 K군은 기절할 것 같은 현기증이 났고 손에서는 홍수가 일어났다. 정신없이 뛰쳐 온 매니저 형이 아저씨를 말리고, 접시를 치우고, 소주를 가져다주고 나서야 "버르장머리 없는 놈" 소리와 함께 K군은 뷔페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로비에서 얼빠진 채 서있던 K군은 괜찮냐는 매니저 형 말에 눈물을 쏟아냈다. 비록 해가 바뀌고 미성년자를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 모든 상황이 K군이 받아들이기에는 힘든 첫 시련이었다. 저 정도 나이 든 아저씨면 '어른'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K군은 생각했다. 어른이란 교양이 있고 마음이 하해와 같이 넓으며 늘 저보다 어린아이들을 보듬어주는 그런 사람들 아닌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냥 나이 먹으면 알아서 생기는 이마의 주름 같은 건 줄 알았다. 그런데 방금 본 아저씨는 학교에서 또는 K군 주변에 있는 어른과는 사뭇 달랐다. 정말로 달랐다.
형 저 그만할래요. 보송한 솜털이 남아있는 얼굴에 눈물자욱이 잔뜩 묻힌 채 말했다. 그만둔다고?
매니저 형은 한숨을 푹 쉬었다. 처음 겪는 일이면 그럴 수 있어, 툭툭 K군의 등을 토닥여 주며 "이보다 더한 일도 진짜 많은데... 너 이 멘탈로 어떻게 사회생활 하려 그래."라며 뼈와 되고 살이 되는 명언을 조심스레 남겼다. 다만 이제 막 온실 유리창에 금이 간 K군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는 조언이었다. 하객들이 밀려들어오는 걸 보던 매니저 형은 아직도 넋이 나가 있는 K군을 쓱 보더니 오늘은 이만 가고 내일 다시 얘기하잔 말을 남기고 다시 뷔페장으로 들어갔다. 바쁘게 들어가는 매니저 형의 뒷모습을 보며 K군은 금이 간 멘탈을 부여잡고 탈의실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여기저기 소스가 튀어 얼룩진 빨간 카라티와 누렇게 변한 수건은 탈의실 한편에 접어두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뷔페장 소음이 K군의 귀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아직 K군은 깨닫지 못했다. 이 정도 시련은 시련 축에도 못 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