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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여정 Jan 26. 2022

초품아보다 중요한 마을 입지



툭!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현관 앞에 검은 봉지가 있다.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앞집 또는 옆집에서 주신 거다. 할머니들이 저녁거리를 밭에서 막! 뜯다가 우리 집이 생각나면 가슴 가득 안 고와서 말도 없이 놓고 가신다. 오늘은 베어 물 때마다 향이 나는 상추다. 이 향은 로컬푸드마켓에서 사도 맡을 수 없다. '막!' 이 중요하다. '막' 뜯은 상추에서만 맡을 수 있다.

여름에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만난 텐트 옆자리 부부는 아파트에 사는데 아이가 뒤꿈치를 들고 다니는 게 안쓰러워서 금요일 저녁이면 이렇게 나온다고 했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바로 연락이 온다고. 주택에 사니 얼마나 좋으냐고.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아이를 키우면서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내 경험에 의하면 말이다. 신혼은 아파트에서 시작했다. 첫째를 낳고 건강을 위해 겁도 없이 연고도 없는 곳에 몽땅 대출을 받아 산속에 집을 짓고 들어갔다. 시골이기 때문에 인심 좋고 넉넉하며 자유롭게 뛰어놀기 좋을 거라는 찰떡같은 믿음은 스스로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요즘 어떤 세상인데 시골이라고 퍼주기만 하고 서로를 돕는다고 생각했을까. 세상에 대한 무지함은 그 대가를 치르게 했다. 어색함에 쭈뼛거리며 인사했던 행동은 '인사도 제대로 못하는 새댁' 이 되었고 가정사를 깊이 알게 된 사이가 되어도 만연하게 벌어지는 '폭력'과 '무관심'을 알은체 했다가는 낄끼빠빠도 못하는 '예의 없는 인간' 이 되었다. 오히려 죽어나가도 조용히 묻힐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알고 바싹 말라버린 마음으로 5년 정도 살았던 보금자리를 내팽개치듯 놓고 허겁지겁 짐을 싸서 나왔다.

모든 것이 서툴렀던 내 잘못이라고 스스로를 옥죄었다. 그렇게 깜깜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새 둥지를 틀었다. 이번에도 시골이고 주택이지만 가구 수가 많고 외려 외지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정했다. 처음부터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곳으로 정했다.

지금 사는 곳은 10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오래오래 살고 싶을 만큼 좋다. 살수록 좋다. 적당히 가깝고 적당히 먼 사이를 유지한다. 내가 다가가는 만큼 가깝고 바빠서 못 보면 그만이다. 나를 생각해서 밭에서 '막' 뽑은 채소를 주시지만 생색내지도 않고 잘 먹었느냐 확인하지도 않는다. 내가 다음에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면 오히려 고마워하신다.

'주택'에 산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누구와 관계를 맺고 사느냐가 중요하다. 사생활에서는 적당한 거리를 두어 터치하지 않고 마음이 동해서 나누는 것이기에 티 내지 않고 어른이라고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며 좋은 정보가 있을 때는 공유하고 누군가를 흉보지 않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러한 이웃들이 나에겐 온 마을이 되고 우리 아이들은 그 속에서 건강하게 자라게 한다.

서울에서 경쟁과 친구관계로 힘든 조카가 나를 따라 동네 모임에 갔다가 "이모! 대박! 여기는 어떻게 '자기 계발', '지속가능' 이란 말을 해? 보통 엄마들끼리 만나면 과외비나 학원, 부동산 정보 공유하는 거 아니야?" 라며 놀라워했다.

실제로 마을 엄마들과 소통하면서 학원, 부동산, 아이들 공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안 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공부로 유명한 아이들은 별로 없다. 조카만 봐도 서울에서 월등한 실력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이곳에서는 월등한 아이가 된다. 성적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다양한 문화생활과 학원, 과외가 지원되지 않으니 '선행학습'이나'조기교육'을 시키지 못한다. 그 대신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졸지 않고 열심히 듣고 학교 교육에 충실하다. 학생 수가 적은데 초등학교는 4곳이나 되어 거의 과외다. 나도 아이들에게 따로 글씨를 알려주거나 다음 학기 꺼 문제집을 풀어보라고 한 적이 없다. 외부 교육이라면 타지에서 온 예술인들과 함께하는 문화활동과 아이들이 하고 싶다고 하거나 부모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지자체에 요청하여 지원받아 진행하는 정도다. 그것 또한 학습위주가 아닌 놀이처럼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매번 진행할 때마다 느끼는 건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훨씬 잘한다는 거다. 특히 창의성은 무한하다. 도자기를 만들자고 하면 도안을 먼저 찾고 그대로 따라 하며 살림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가족들과 함께 먹고 싶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서로 이야기 나누며 생각해내고 만들어본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지 않고 서로를 도와가면서 한다. 이러한 방식은 초등학교에서도 동일하다. 학생 수가 적어서 다른 학년과 합반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린 친구들은 언니 오빠를 보며, 위에 아이들은 따로 동생들을 가르쳐주며 자연스럽게 같이 한다. 현장학습도 다른 학교와 같이 가는 경우가 많아서 학교와 상관없이 온 마을의 아이들은 서로 알게 된다. 그렇게 우린 같이 성장한다.

결국 몇 달간 같이 살던 조카는 엄마를 설득하여 동생네 부부가 서울 살이를 정리하고 내려오도록 만들었다. 동생이 내려올 때 주변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동생네 이야기를 하며 치솟는 부동산 가격에 그 '마을'에서 나가떨어지는 것처럼 말했다고 한다. 물론, 일부 지인들은 코로나로 밖에도 못 나가는데 시골로 내려갈 수 있음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아는 만큼, 가려진 시야만큼, 관점에 따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 마을에서 나가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삶이 아닌 내가 있어서, 같이 있어서 우린 서로 좋다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면 그곳이 아파트 일지라도 좋을 것이다. 바닷가에서 만난 부부가 힘든 건 아파트라서 이기보다는 아래층에 사시는 분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이곳에서 지역 중학교까지 보낼 것이고 고등학교도 학생 수가 적고 문화활동과 동아리가 많은 학교를 선택하여 보낼 것이다. 아이들에게 목표는 상위 대학 입학이 아니다.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질을 갖추어 진입하는 거다.

이번 방학에 서울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이 동네에 사는 아이들에게 그림을 알려준다고 하였다. 마스크를 벗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간식조차 줄 수 없어 안타깝지만 아이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같이 참여할 수 있음에 고마워한다. 그리고 우리 집 현관에 들어오면 큰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한다. 거실 한편에서 2시간 가까이 조용히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을 보며 우리 아이들이 마을에서 키워졌듯 나도 이 아이들에게 마을이 되어 자라게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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