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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Jan 14. 2021

김밥은 어려워

유치원 다니던 딸아이에게 한 번씩 찾아오는 소풍날은 설렘과 즐거움으로 가득했을 텐데, 사실 나에게는 분기마다 잊지 않고 돌아오는 그 날이 그저 반갑지만은 않았다. 김밥 때문이었다. 딸아이 유치원에서는 평상시 점심에 급식을 했는데, 소풍날만은 꼭 김밥 등 도시락을 싸서 보내야 했다. 야근을 밥먹듯이 하고 돌아와 다시 아침이 되면 물 한 모금도 사치라며, 부랴부랴 화장만 대충하고 다시 출근길에 오르곤 했던 나는 솔직히 아침시간에 김밥 도시락 싸는 일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친정엄마도 워킹맘이었던 어린 시절, 내 소풍날이면 엄마는 새벽 4시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일어나 김밥을 말아 도시락을 싸놓고 일하러 가시곤 했다. 그런 날이면, 아침에 일어나 김밥을 말고 있는 엄마 옆에서 이것저것 손으로 집어먹으며 참견했었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는 그 풍경을 따뜻하게만 기억했었는데..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그제야 분주했던 그 손길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내내 쉼 없이 움직였는데도 설거지도 제대로 못하고 후다닥 옷을 바꿔 입고 급히 나가시던 바쁜 종종걸음이 보였다.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라면 응당 잠을 더 줄여서라도 김밥 정도는 싸줘야 한다는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 집 김밥을 싸는 일은 매우 길고 고단한, 노력 대비 가성비가 무척 떨어지는 일이라는 선입견이 뒤섞여 내 마음속에 세상 제일 어려운 음식으로 등극해버렸고, 그렇게 불편한 마음만 더해갔다.


딸아이가 유치원 다녀오면 퇴근시간까지 친정엄마가 봐주셨는데, 일하는 딸이 안쓰러운 엄마는 손녀를 위해 싸는 김밥은 전혀 힘들지 않다며 기꺼이 소풍날 아침마다 김밥을 만들어 주셨고, 나는 죄송한 마음을 애써 외면한 채 또 한 번 나쁜 딸이 되곤 했다. 그리고 또 어김없이 소풍은 돌아왔고, 그날도 딸아이는 외할머니표 김밥을 싸가게 될 참이었다. 그런데 당일 새벽 갑자기 문자메시지가 왔다. "우천으로 인해 소풍이 일주일 뒤로 연기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친정엄마께 연락을 드렸는데, 이미 김밥 말기는 진행 중이었고, 모든 식구들이 그 날 김밥 포식을 했다. 일주일 뒤, 똑같은 일이 반복되어 소풍은 또 한 번 연기되었고, 나는 애꿎은 유치원에 전화해 볼멘소리를 했다. "아니, 소풍이라고 매번 전날부터 재료를 준비해서 도시락을 싸는데, 계속 새벽에 이렇게 연락을 주시면 어쩌나요? 저흰 매주 김밥을 말고 있어요." 내가 도시락 싸는 것도 아니면서 민망한 마음인 건지, 친정엄마에게 죄송한 마음인 건지 전화하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전화를 끊고 사실 김밥 한 줄 아침에 나가서 사도 되는 건데, 집 김밥을 고집하는 것도, 친정엄마가 새벽부터 김밥 마시도록 둔 것도 나인데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가라앉았고, 부끄러운 마음도 함께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그 뒤부터는 딸아이의 소풍 도시락은 내가 준비한다. 김밥은 두려워했던 것만큼 어렵거나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필요한 재료는 많지만, 사실 시금치 데칠 시간이 없다면 냉장고에 잠자던 오이를 후딱 썰어 넣어도 될 일이었고, 김밥을 잘못 말아 터지면 새 김으로 한번 더 말면 될 일이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부담을 내려놓고 나니, 더 이상 어렵지 않았고, 알록달록 눈이 즐거워지는 다양한 색감의 김밥을 꼭꼭 잘 말아서 예쁜 도시락에 담아 마무리할 때는 회사에서 골칫거리이던 업무를 깔끔하게 처리했을 때의 뿌듯함과 비슷한 성취감까지 느껴졌다. 엄마가 말았다고 좋아하며 맛나게 먹는 딸아이를 보니, 왜 진작 이 기쁨을 누리지 못했었나 아쉬운 마음까지 들었다. 얼마 전에는 빗길에 넘어지셔서 손목 골절로 힘들어하시는 친정엄마를 위해 김밥 도시락을 싸서 친정으로 출동했다. 내 어린 시절 소풍날의 기억이 고소한 참기름 향으로 든든하고 따뜻하게 남아있는 것처럼, 나도 이제 엄마에게 맛있는 추억을 종종 선물해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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