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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Aug 07. 2021

무화과의 습격

여름과 가을 사이

어제 마트 과일코너에서 잘 익은 무화과를 발견하고 갑자기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이 과일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추석 전날, 오랜만에 간 시댁 앞마당의 무화과나무에는 어김없이 탐스런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있고, 손녀가 무화과 따는 재미를 놓치지 않도록 낮은 가지에 열린 다 여문 아이들을 일부러 남겨두신 아버님의 배려에 딸아이는 이번에도 짧은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 한낮의 더위는 채 가시지 않았지만, 이때 한 번씩 부는 바람은 시원하고 달큰한 기운을 품고 있다. 추석 전날이면 우리 집에서 꼭 볼 수 있는 이 풍경이 수년 째 이어지면서, 나에게 무화과는 가을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무화과를 보면 한편으로 아, 가을이 오고 있구나. 올해도 이제 슬슬 가고 있구나 그런 조급한 마음이 함께 밀려온다. 나 올 해는 뭘 한 거지.


올해 초, 나이 앞자리가 바뀌면서 이제는 시간을 정말 촘촘히 써보겠다 결심을 했었더랬다.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우연히 읽게 된 "미라클 모닝"과 "마녀 체력"에 크게 감명을 받고, 나는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을 뚫고 운동을 하고 와도 아침 7시 전이라니 정말 엄청난 시간을 선물 받은 느낌이었고, 체력 유지와 상쾌한 기분은 물론 다이어트까지 이 좋은 걸 그동안 왜 안 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났을까. 아주 늦은 밤까지 업무를 할 수밖에 없던 며칠을 보내고, 분명 아침에 알람을 들은 적이 없는데 나는 일곱 시에 눈을 떴다. 바로 준비하고 출근할 시간. 한 번 무너지니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늦게까지 일했단 핑계로 합리화하면서 짧은 나의 미라클 모닝은 막을 내리는 듯했다. 나란 인간이 그럼 그렇지. 40년 동안 밤의 낭만을 사랑하며 올빼미로 살아온 습관의 힘은 무서웠고, 나는 달콤한 꿀잠 타임에 나의 의지를 양보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니 일주일 동안 경험했던, 시간을 선물 받는듯한 그 여유로운 느낌이 자꾸 다시 생각이 났다. 내가 내 시간을 조절하여 쓰고 있다는 그 기분은 생각보다 괜찮은 것이었고, 늦은 밤까지 딸내미 숙제 봐주고, 집안일과 회사 업무 사이에서 시소 타기 하듯 매일을 분단위로 나눠서 쓰고 있는 생계형 워킹맘에게 그런 고요한 시간은 정말 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작했다. 요즘은 달리기 대신 6시쯤 일어나 간단히 요가를 하고 책을 읽고 있는데, 복작복작한 일상의 고민들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그 시간이 참 좋다. 그 시간만으로 부자가 된 느낌이랄까. 그 좋은 느낌을 기억하기에 내일을 위해 요즘은 자연스레 늦어도 12시엔 잠자리에 들게 된다. 올해 결심했던 많은 것들 중에 아직 시작도 못한 일도 많지만, 이 새로운 습관 덕분에 무화과를 따는 계절을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한여름의 수박처럼 시원하고 노골적인 단 맛은 아니지만, 달짝지근하면서 부드러운 것 같다가도 톡톡 터지는 반전이 있는 맛. 혼자 먹을 때보다 호밀빵과 크림치즈에 곁들여 먹을 때, 잘 말려서 각종 샐러드에 넣어먹을 때 더 빛이 나는 매력적인 과일. 이제 나는 핑크빛 속살을 머금은 달콤한 무화과의 계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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