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빼미와 얼리버드의 슬기로운 결혼생활
갓 결혼한 우리의 주말에는 시차가 존재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느니, 새벽 4시까지 잠을 자지 않는 편을 택하는 게 더 수월한 철저한 저녁형 인간인 나는 한 주간 출퇴근으로 억눌러왔던 나의 올빼미 세포를 주말 아침의 늦잠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은 직장인의 응당한 권리라 믿었고, 초인종이 울린다거나 해서 아침 일찍 눈이 떠지기라도 하면 빚을 다 못 받아낸 빚쟁이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반대로 남편은 내가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소위 얼리버드였고,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제 할 일을 했다.
결혼 전에는 그게 멋져 보였다. 누가 뭐라 하는 이 하나 없어도 주말마저 일찍 일어나 성실하고 촘촘하게 시간을 채우던 그가 대단해 보였고, 인생을 허투루 쓰는 일 따위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이건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일찍 일어나면 일찍 자야 한다는 그 단순하고도 당연한 사실을. 그는 밤 9시 뉴스를 보다가 졸곤 했다. 금요일 저녁, 내일 출근 걱정도 없으니 하며 맥주 한 캔 들고 소파에서 함께 영화를 보다가 저 여배우가 어쩌고 하며 말을 건네면, 그는 이미 잠들어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금요일 밤 10시는 잠들기엔 너무나 아까운 시간이었다. 내일의 스케줄에 쫓기는 기분 없이 한 주간 바쁘게 지내며 좋았던, 그리고 힘들었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고 싶었고, 함께 와인 한잔을 하고 싶었고, 함께 오래된 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런 신혼의 로망에 대한 욕심으로 나는 잠든 남편을 깨워대곤 했다. 아직 10시인데 벌써 자는 거냐면서. 하지만, 그렇게 깨워도 이미 그를 점령한 잠 기운은 달아날 줄 몰랐고, 자다 깨서 예민해진 남편과 그게 서운해진 나에게 행복한 불금은 없었다.
그의 저녁잠도 나의 신혼의 로망도 포기를 몰랐기에, 우리의 수많은 금요일은 똑같은 시나리오로 그렇게 불편하게만 흘러갔는데, 뜻밖의 화해의 지점은 딸아이를 낳고부터 찾아왔다. 갓 태어난 아기를 키우는 초보 엄마 아빠는 아이를 며칠만 데리고 있다 보면 알게 된다. 신생아들이 얼마나 자주 깨고, 자주 먹고, 자주 우는지. 그로 인한 수면부족이 인간을 얼마나 바닥까지 끌어내리는지. 서로의 바닥까지 확인한 우리는 그때 결혼 후 가장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오전 3시 30분을 기준으로 세우고, 그 시간 그 이후 아기가 깨면 남편이, 그 전에는 내가 아이를 달래고 먹이기로 했다. 30분까지 칼같이 나눈 게 참 야박해 보이긴 했지만 각자의 생체리듬에 맞춘 최적의 기준이었고, 그렇게 정한 이후로 우리에게는 각자 최소 4시간의 통잠이 허락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엄청난 삶의 질 향상을 가져왔고, 우리는 전보다 훨씬 수월한 육아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제야 보였다. 그도 주말이면 아침 열 시 열한 시까지 눈도 못 뜨는 내가 늘 좋고 편하기만 했을까.
그렇게 그의 저녁잠을 인정하게 되면서, 나는 행복한 불금도 찾게 되었다. 나는 함께 영화를 시작하다 잠든 남편을 더 이상 깨우지 않는다. 그리고 혼자 천천히 아껴두었던 와인 한잔과 오래된 영화를 음미하며 한 주의 복작복작함을 잊는다. 결혼 십 년, 이제는 혼술이 더 편해서인 건지, 서로 너무나 다른 우리를 인정하게 되서인 건지 아님 둘 다인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의 금요일은 예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고, 나는 그런 지금의 우리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