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으로 세계여행
나는 여행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한 계획형 인간이다. 거기다 언젠가부터 아주 일찌감치 여행 계획을 세우는 습관이 생겼었는데, 가령 여름 휴가지는 그 해 1월부터 정해두곤 했었다. 올해는 어디를 갈지 여러 후보지들을 놓고 남편과 세상 신중하게 고민하고, 출퇴근길에 틈틈이 가장 싼 항공권과 호텔을 검색했다. 얼리버드 특가의 행운을 누리기 위해서였기도 했지만, 그렇게 일찍 정해두고 나면 여름휴가까지 설렘으로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어떤 맛집에 갈지, 어떤 곳을 가야 투어리스트가 아닌 현지인처럼 진정한 맛과 멋을 느낄 수 있을지 이미 다녀온 사람들의 블로그나 여행책자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일에 치여 힘든 날에도 다음 달이면 잠시나마 훌훌 털고 여행을 간다는 사실은 나를 계 탈 날 기다리는 여인네의 마음으로 만들어 주었고, 그 즐거운 상상에 복작복작한 일상도 잠깐씩 핑크빛으로 탈바꿈하곤 했다.
그렇게 느린 듯 빠르게 흐르는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면 드디어 여행 가는 날이 온다. 대부분의 저렴한 항공권은 아침 첫 비행기가 많다. 신새벽에 잠이 덜 깬 부은 얼굴로 차가운 바람을 뚫고 공항에 가 면세품을 찾고, 그렇게 짐을 풀고 쌌으면서 목베개를 또 까먹은 것을 한탄하며 잔 것도 안 잔 것도 아닌 불편한 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는 새벽 비행기 같은 건 타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여행지에 발을 딛고 나면 그 마음은 이내 눈 녹듯 사라졌고, 다음번에도 나는 비용을 아끼려, 시간을 아끼려 새벽 비행기를 타곤 했다.
코로나로 여행길이 막힌 요즘, 신기하게도 나는 멋들어진 여행지의 탁 트인 풍경보다도,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여행을 시작하기까지의 이 소소한 준비 과정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항공권 검색사이트와 호텔 예약 앱을 매일 닳도록 방문하던 나는 아마 여행이 아니라 여행을 기다리는 몇 달치의 설렘을 사기 위했던 게 아니었을까.
요즘 기약 없는 코로나 시대에 기다릴 여행이 없는 게 유독 힘 빠지는 날에는, 여행지에서 먹었던 음식을 만들어 먹곤 한다. 그 지역 맥주도 분위기를 살릴 필수 아이템이다. 하와이에 가고 싶을 때 냉동새우에 찐한 버터와 다진 마늘 듬뿍 넣고 볶아내어 빅웨이브 맥주와 함께하니, 지오반니 트럭에 온 것 같은 느낌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기분이 났다. 남편과 함께했던 하와이 여행 추억들에 대한 얘기가 저절로 나오며, 금세 행복한 저녁이 되었다.
얼마 전, 바르셀로나 보케리아 시장 앞 까르푸에서 구입했던 이네딧 담 맥주를 마트에서 발견하고는 올레를 외쳤다. 오늘은 스페인이다! 코스트코에서 산 냉동 대구살로 바르셀로나에서 감탄하며 먹었던 꿀 대구찜을 어설프게 따라 해 보면서, 만원에 네 개 세계맥주가 주는 지대한 기쁨과 위로에 대해 곱씹었다. 다가오는 주말에는 어딜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