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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Dec 23. 2020

외할머니의 살림

"우리 손녀딸 사랑해~"

외할머니와 통화를 하면 할머니의 마지막 인사는 사랑해로 끝났다. 나 역시 외할머니를 많이 사랑하지만 그게 뭐가 어렵다고 '사랑해요'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저도요~"라고 대답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도 전할 수도 없는 그 말을 왜 그리 아꼈을까. 나는 아직도 사랑했던 외할머니의 부재가 믿기지 않고, 믿고 싶지 않다. 


6년 전,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떠나신 외할머니는 늘 사랑이 가득하신 분이셨다. 언제나 "사랑해~"라는 말로 표현을 하셨고, 그 단어보다 더 많은 사랑을 조건 없이 퍼주셨다. 엄마보다 더 사랑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나에게 외할머니의 존재는 크고 넓었다. 50이 넘은 연세에 성경책을 읽으시기 위해 한글을 배우셨던 우리 할머니. 깍두기공책에 한글을 공부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한데 할머니는 내 곁에 없다.


6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충격에 많이 울었고 많이 아팠었다. 천국에 가셨을 거라고, 행복하실 거라고 어른들은 말씀하셨지만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다는 현실은 가슴을 찢어 놓는 듯 고통스러웠다. 너무 울고 고통스러운 데다 감기 기운까지 있던 나는 고열 때문에 할머니 장례식 중 병원에 입원을 했다. 결국은 할머니의 마지막 길도 지키지 못하고 내 한 몸 살겠다고 발버둥을 쳤었나 후회스럽기도 하다. 




외할머니에게 나는 첫 손주였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더 사랑받았고, 더 많은 축복을 받았었다. 그 사랑에 보답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제는 보답할 길이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문득문득 눈물이 난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4년 만에 할머니가 사셨던 집엘 찾아갔었다. 다시 용기를 내서 찾아가기까지 무려 4년이 걸렸던 것이다. 


막내 이모가 살고 계셨던 외할머니댁은 여전히 할머니의 흔적들로 가득해서 눈길이 닿는 곳마다 애써 눈물을 참아야 했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곳에 사셨다. 내가 바로 옆에 있던 초등학교에 다녔을 때도, 내가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갔을 때도, 내가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었을 때도 할머니 댁은 그곳이었다. 


이모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할머니가 가지고 계시던 앨범 속 나의 어린 시절 그리고 엄마의 어린 시절을 보며 옛날을 회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오래된 살림을 주섬주섬 챙겼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할머니의 살림들 속에는 나의 과거도 머물러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미역국을 담아주셨던 국그릇, 커피 2스푼, 프림 2스푼, 설탕 2스푼을 넣어 커피를 탔던 머그잔, 내가 선물해 드린 생선 굽는 냄비 등 소박한 살림살이는 과거에 멈춘 듯 새것은 없고 오래된 것들로 가득했다. 그중에서 우유색의 접시와 오래된 컵들을 챙겼다. 

신문지에 돌돌 말아 집으로 가져와 엄마한테 보여드리니 너무 반가워하신다. "그 컵 내가 시집갈 때 산 거야~ " 용도도 분명하지 않은 유리잔이 엄마가 시집갈 때 사신 거란다. 벌써 30년도 넘은 그 유리 잔속에는 할머니의 추억, 엄마의 추억,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 갈 나의 추억이 담겨있다. 

그 잔에는 요플레를 담아먹고 아이스크림을 담아 먹는다. 우유색 접시는 우리 집 메인 접시로 잘 사용하고 있다. 유행이 지나 벗겨지고  촌스러워진 컵과 접시지만 세상에 어느 명품 그릇보다 더 가치 있고, 더 소중한 재산. 두고두고 곱게 간직하리라 마음먹었다.


외할머니의 살림과 함께 생활하며 자주 할머니를 떠올린다. 사랑이 가득하셨고, 언제나 부지런하셨던 나의 사랑하는 외할머니. 나에겐 마더 테레사보다, 나이팅게일보다 더 천사 같았던 우리 외할머니.


오늘따라 무척 보고 싶습니다.


엄마가 시집갈 때 사신 잔 / 할머니의 우유색 접시 / 타원형 우유색 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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