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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도 Dec 25. 2020

증도에서 보낸 어느 크리스마스

특별한 크리스마스는 우연히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특선영화 '나 홀로 집에'가 방송되는 것처럼 나에게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떠오르는 특별한 추억이 있다. 전남 신안군 증도에서 보낸 2박 3일 크리스마스 여행. 지금은 다리가 놓여 차를 가지고 편하게 갈 수 있지만 2009년 크리스마스에 만난 증도는 말 그대로 섬이었다. 바로 다음 해인 2010년에 다리가 개통될 예정이었기에 섬의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을 때 다녀오자며 크리스마스에 여행을 떠났다.


증도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복잡했는데 서울에서 광주로 간 뒤 광주에서 지도읍으로, 지도에서 증도로 가는 선착장까지 간 뒤 배를 타야 했다. 증도에 도착하면 딱 한 대 있는 버스를 이용해 숙소로 가는데 섬은 제법 넓었고, 버스는 한 대뿐이어서 차가 없으면 여행에 제약이 제법 크던 때였다. 그렇게 어렵게 증도에 도착했을 땐 이미 피로가 가득했고, 화이트 크리스마스 대신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지만 괜찮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세상 너그러운 여행자였으니까. 많이 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런 나의 마음과 꼭 맞는 여행 친구가 함께하고 있었다. 우리는 읍내의 조용한 민박집에 짐을 풀고 잠시 낮잠을 잤다.


얼마쯤 잠을 자고 일어나니 해가 떨어질 시간. 날이 흐려도 좋으니 바닷가를 걷자며 민박집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는 짱뚱어다리로 향했다. 바람은 차가웠고, 섬은 조용해서 크리스마스라는 것이 더욱 실감 나지 않았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꽁꽁 얼어가던 그때, 짱뚱어 다리 끝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사막의 오아시스가 있다면 딱 이런 느낌이 아닐까? 그 정체는 이동식 카페?!




바닷가 앞에 나타난 바퀴가 달린 목조건물은 카페 겸 간이 포장마차였다. 지금이야 카라반이며 캠핑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10년도 더 된 그때는 어찌나 신기하던지.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한 따뜻한 풍경에 마음이 한껏 녹아들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피해 들어간 실내는 굉장히 아늑하고 심지어 크리스마스 분위기까지 났다.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캐럴송이 울려 퍼지는 따스한 공간, 그렇게 우리의 특별한 크리스마스는 우연히 시작되었다.


꽁꽁 언 손을 녹여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분위기에 취한 사이 크리스마스의 밤은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와 카페를 차리신 사장님의 사연, 차가 없으면 여행하기 쉽지 않은 증도를 여행하는 방법 같은 소소하고 알찬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커피를 마시던 우리의 손에는 어느새 막걸리가 들려 있었다. 커피만 마시고 가려다 눌러앉아 사장님이 직접 만드셨다는 고구마 막걸리를 주문했고, 안주로 석화를 주문했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숯불에 타닥타닥 익어가는 석화구이 그리고 서비스로 주신 군고구마를 먹던 2009년의 크리스마스. 나를 위해 준비해놓은 특별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그해의 크리스마스는 온기가 가득했다.


막걸리를 마신 뒤 어두운 바닷가를 지나 민박집으로 향하던 그 길이 떠오른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빨갛게 달아올랐던 볼은 뜨거웠고, 마음은 몽글몽글 행복으로 채워져 있었다. 소 울음소리에 놀라 뜀박질하던 추억까지 기억나는 걸 보면 그날 나는 참 행복했나 보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오늘이 생각날 것 같아."라는 말을 했었고 벌써 10년이 넘도록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날을 떠올린다. 몇 년 뒤 다리를 건너 다시 찾은 증도는 많이 변해있었고 카페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지만 추억은 여전히 남아 오늘도 그날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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