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낙후된 도시 귈렌에 화려한 노부인(클레어 자하나시안)이 방문한다.
클레어 자하나시안
귈렌에 온 건가?
승무원
부인이 비상 브레이크를 당겼습니까?
클레어 자하나시안
난 항상 그래요.
승무원
강력하게 항의하는 바입니다. 비상사태라 해도 이 나라에선 결코 비상 브레이크를 당기지 않습니다. 시간표대로 정확하게 운행하는 게 가장 중요한 원칙이란 말입니다. 해명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생략) 해명을 기다립니다. 직무상. 철도 관리국의 이름으로요.
클레어 자하나시안
멍청하군. 난 다름 아닌 이 도시를 방문하려는거요. 열차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했어야 하는 건가?
승무원
부인. 귈렌을 방문하고자 하신다면 칼버슈타트에서 12시 40분발 보통 열차를 타시면 됩니다. 누구나 알아요. 1시 17분 귈렌 도착이란 걸 말입니다.
클레어 자하나시안
로켄, 브룬휘벨, 바이젠바흐, 로이테나우에 서는 그 보통 열차? 고작 여길 오느라 삼십 분이나 허비하란 말인가?
승무원
부인,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클레어 자하나시안
보비, 이 사람에게 1000을 줘요.
일동
(웅성거린다.) 1000이래.
집사, 승무원에게 1000을 건네준다.
승무원
부인.
클레어 자하나시안
철도 미망인 재단에 3000을 더 내고.
일동
(웅성거린다.) 3000.
승무원이 집사에게 3000을 받는다.
승무원
(어리둥절해하며) 그런 재단은 없습니다, 부인.
클레어 자하나시안
자네가 하나 만들든지.
시장이 승무원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말한다.
승무원
(깜짝 놀라서) 부인께서 클레어 자하나시안 여사입니까? 오, 죄송합니다. 그러면 물론 사정이 다르지요. 약간만 눈치를 챘어도 당연히 귈렌에 정차했을 겁니다. 돈은 돌려 드리겠습니다, 여사님, 4000입니다. 이거야 원.
일동
(웅성댄다.) 4000.
클레어 자하나시안
푼돈이니 자네가 갖게. 기차나 빨리 출발시켜요.
모비 (그녀의 7번째 남편)
(우는 소리로) 기자들은, 자기야? 기자들이 아직 내리지 않았어. 리포터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앞쪽 식당 칸에서 식사 중인데.
클레어 자하나시안
식사나 계속 즐기라지 뭐, 모비. 당분간은 기자들이 필요 없으니까. 나중엔 반드시 오게 될 테지만.
역장
(신호봉을 들어 올리며) 출발!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 서른여섯 번째 작품은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입니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ürrenmatt, 1921–1990)는 스위스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입니다. 뒤렌마트는 고전적 의미의 비극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보고, 부조리한 현실을 비극 대신 희극으로 재현하겠다고 선언한 작가 중 한 명입니다.
간단한 내용은 이러합니다.
몰락해 가는 소도시 귈렌에 세계적인 대부호인 노부인 '클레어 자하나시안'이 45년 만에 고향(귈렌)을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클레어는 마을 사람들에게 10억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단 한 가지 조건을 내겁니다.
바로 자신의 옛연인 '일'을 죽여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젊었을 적 '일'과 그녀 사이에 아기를 가졌는데 '일'은 법정에서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위증했고, 그로 인해 그녀만 모든 책임을 떠안은 채 마을에서 쫓겨나듯 도망쳤던 것입니다. 이후 그녀는 매춘부로 전락해 부자들과 결혼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과거의 상처에 대한 복수를 위해 다시 이곳으로 온 것이었죠.
제가 선별한 장면은 이러합니다.
어느새 마을 사람들은 돈을 받을 생각에 모든 물건을 사치스럽게 외상하며 호화생활을 누립니다. '일'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는데요. 죽음을 심판하는 자치회가 열리기 전, '일'은 무기력하게 가족들의 모습을 지켜봅니다.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일
모든 게 새것이군. 우리 가게가 지금처럼 참신하게 보일 때가 있었나. 깨끗하고 산뜻하네. 이런 가게를 꼭 한번 갖고 싶었지. (딸의 손에서 테니스 라켓을 받아 든다.) 테니스를 치나?
딸
몇 시간 교습을 받았잖아요.
일
아침 일찍, 그렇지? 노동청에 간 게 아니었나?
딸
친구들이 모두 테니스를 치는 걸요.
침묵.
일
방에서 보니까 차를 타고 있던데, 아들?
아들
별로 비싸진 않아요.
일
언제 운전을 배웠지?
침묵.
일
기차역으로 뙤약볕 아래 일을 하러 간 게 아니었나?
아들
가끔은 했어요.
일
양복을 찾다 보니 모피 코트가 하나 있던데.
아내
견본으로 입어 본 것뿐이에요.
침묵.
아내
누구나 빚을 져요, 여보. 당신만 예민해요. 그렇게 겁을 내다니 정말 웃을 일이에요. 그 일은 분명 잘되게 돼 있어요. 당신은 머리카락 한 올도 다치지 않고요. 클라라는 말처럼 단호하지 못해요. 내가 알아요. 심성이 고운 애거든요.
딸
맞아요, 아빠.
아들
아빠도 아실 텐데 그러세요.
침묵.
일
(천천히) 토요일이다. 네 차를 타 보고 싶구나, 아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지. 우리 차를 타는 건.
아들
(믿지 못하며) 진심이세요?
일
외출 준비들 하지. 우리 함께 드라이브를 하자꾸나.
아내
(믿지 못하며) 나도 가자고요? 우리 형편에 그러면 안 되잖아요.
일
안 될 게 뭐 있소? 당신 모피 코트를 입어요. 이 기회에 새 옷도 개시하는 거지. 준비할 동안 나는 장부 정리나 하고 있을게.
가족들은 나간다. 일은 장부 정리에 몰두한다. 왼쪽에서 시장이 총을 들고 온다.
시장
안녕하시오, 일 씨. 개의치 마세요. 잠깐 둘러보기만 할 테니.
일
그러시죠.
시장
총을 한 자루 가져왔소. 장전된 총이오.
일
내게는 필요 없는데요.
시장
오늘 저녁에 시 자치회가 소집됩니다. 황금 사도 호텔에서요. 그곳 극장 홀이오.
일
가지요.
시장
모두 옵니다. 댁의 문제를 다룰 거니까. 우리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몰려 있소.
일
내가 봐도 그렇군요.
시장
노부인의 제안은 기각될 것이오.
일
그럴 수 있겠죠.
시장
물론 오류를 범할 수도 있을 거요.
일
당연히. 고맙네요.
시장
(생략) 당신 좋으라고 그러는 게 아니오. 성실하고 정직한 당신 가족을 위해서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소. 우린 공정한 게임을 하는 것이오. 인정해야 합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침묵을 지켰소. 좋습니다. 허나 앞으로도 입을 열지 않겠습니까? 발설할 생각이라면 우린 자치회도 열지 않고 모든 일을 해치우지 않을 수 없소.
일
이해할 만합니다.
시장
이제 어쩔 거요?
일
대놓고 위협하는 말을 들으니 기쁘군.
시장
내가 댁을 위협하는 게 아닙니다, 일 씨. 당신이 우릴 위협하고 있는 거지. 만약 당신이 말을 하겠다면 바로 그 때문에 우리도 움직여야 되는 거요. 그것도 미리 말이오.
일
아무 말도 않겠소.
시장
자치회에서 어떤 결정이 나든?
일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요.
시장
됐습니다. 자치회 판결에 따르겠다니 좋습니다. 일 씨, 당신 마음속에 명예심이 아직 어느 정도는 살아 있군요. 그런데 말이오, 이 자치회 법정을 전혀 소집할 필요가 없다면 더 좋지 않겠소?
일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시장
당신이 아까 그랬지. 총이 필요 없다고. 혹시 지금은 총이 필요하지 않소?
침묵.
시장
그렇게만 해주면 우린 당신을 처벌했다고 노부인에게 말할 수 있을 테고, 돈도 받겠지요. 며칠 밤을 고민하고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오. 쉽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명예로운 남자로서 책임을 지고 생을 마감한다는 것, 사실상 바로 그게 댁의 의무가 아닐까합니다. 안 그렇소? 공동체 의식이 있고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분명 그럴 거요. 가난에 시달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았잖소. 그 비참함, 굶주리는 아이들.
어떤가요? 꽤 섬뜩하지 않나요?ㅎㅎ 마치 그... 졜렌스키 대통령에게 면박하는 미국 부통령처럼, 겉으론 존경을 담아 말하는 것 같지만 그 말의 내용은 너무나 서늘하고 무서운..
결말은 반전 없이 결국 일이 죽으며 끝이 납니다.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1.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문득 겁이 났던 경험이 있나요?
2. 좋은 말로 시작했는데, 듣다 보니 기분이 묘하게 나빴던 적이 있나요?
3. 그럴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기분 나쁜 내색을 하나요, 혹은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기나요?
4. 현실적으로 둘 중 어떤 것이 음... 더 upstairs일까요? (적당한 단어가 생각이..)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No family is complete without an embarrassing uncle.
뻘쭘한 삼촌 하나 없이 완전한 가족은 없다.
-피터 모건
오늘의 시입니다.
김삿갓의 姜座首逐客詩(강좌수축객)
祠堂洞裡問祠堂사당동리문사당 : 사당 동네의 사당 집을 찾아가서 하룻밤 자기를 청하니
輔國大匡姓氏姜보국대광성씨강 : 보국대광이란 신분의 강씨 사람이 딱 잡아떼며 거절하네.
先祖遺風依北佛선조유풍의북불 : 선조의 유풍은 불교가 분명한데
子孫愚流學西羌자손우류학서강 : 자식 새끼들은 어리석게도 오랑캐 교육을 받았구나...
主窺簷下低冠角주규첨하저관각 : 저 놈이 처마에서 관각이라는 모자를 쓰고 내가 갔나 안 갔나 확인하네
客立門前嘆夕陽객립문전탄석양 : 나 같은 나그네는 문전에서 석양을 탄식할 뿐이고..
座首別監分外事좌수별감분외사 : 에라이, 좌수별감이라는 높은 신분은 너의 분수 밖이며
騎兵步卒可當當기병보졸가당당 : 기병이나 보병쯤이 마땅하도다..
참으로 뻘쭘할 때란, 내가 그곳에 있는 게 잘못인지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 잘못인지, 뻘쭘함이란 내 논리를 완전히 잃어버렸을 때 적용하는 최후의 비평인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