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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희극의 파편」35. 이육 - 청파극담 中

by 재준

옛날 개씨 성을 가진 점잖은 재상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기괴한 버릇이 있었다.


그건 바로 밤이 깊어 부인이 잠에 들면 여자종이 있는 곳에 가서 몰래 정사를 즐기는 일이었다.


그것은 굉장히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낮에는 물론 부인이 잠에 들기 직전까지 그는 거들먹을 떨며 도도하기만 하였다.


「희극의 파편」은 단편, 장편 희곡 중 재미있는 한 장면을 선별해 그 감정적 여운과 미학적 장치를 분석하고 현대적 맥락에서 다시 사유해보는 비평적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특정 장면이나 대사를 가지고 이리저리 뜯어보면서 독자와 함께 놀아보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희극의 파편」 서른다섯 번째 작품은 이육의 '청파극담'입니다.


'청파극담'은 조선 전기 문신 이육이 역대 인물들의 일화 및 소화를 중심으로 엮은 필기집입니다. 그 중 '벼락에 맞은 한 재상'의 이야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부담없이 가볍게 한번 읽어보시고 가세요^^


부인이 과연 모르고 있었다면 그건 순진함을 넘은 어리석음이었을 것이다. 세상일은 결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 법.



어느날, 밤이 되었다. 부인은 자는 척을 해보았다. 그러자 어김없이 남편은 콧노래를 부르며 집 밖을 빠져나갔다.


가만히만 있을 부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몰래 그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다다른 곳은 역시 여자종의 방이었다.





여자종이 물었다.


아니 도대체 왜 자꾸 찾아오시는 겁니까?




여자종도 남편을 그리 반기지는 않았다.

부인은 그 말을 듣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절병節餠(찰떡) 같은 부인을 놔두고 왜 자꾸 귀찮게 하시는 겁니까?



남편은 허허, 거리며 웃기만 하였다.


저런 바보를 보았나.. 여자종한테도 무시를 당하는구나,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 남편이 한마디 꺼내는데 그 말은 곱씹을수록 가관이었다.


산갓 김치山芥沈菜를 먹을 때도 있는 법이다. 매번 찰떡을 먹으면 목이 메는 법이지 않느냐? 가끔씩은 개운하고 깔끔한 것을 잊을 수 없느니라.



부인은 더 들을 수 없어 돌아서 버렸다. 안방으로 돌아간 부인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으니 그제야 남편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그 발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몰래 문틈으로 내다보니 그는 한참을 댓돌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러고 들어와선 부인이 깨어있는 모습을 보곤 화들짝 놀라며 하는 말이


"아이고, 배가 아파서 변소에 한참을 있었네. 엉덩이 좀 만져보게. 차가워진 것 좀 봐."


부인은 등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게 산갓 김치를 좀 작작 드시지요. 그럼 복통도 없을 건데.

응?

뭐, 왜요?

어... 아니오, 부인은 참으로 용하구려...


며칠뒤, 억수같이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남편은 바깥을 보며 중얼거렸다.


"허... 비가 참 대단하구나. 좀 쉬었다가 오든지 하지 않고서..."


역시 아내는 자지 않고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번쩍 하는 번개로 부엌을 바라보니 커다란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다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정성이 대단하군...


부인은 혀를 차고 자리에 누웠다. 이내 다시 일어나 한참 궁리에 잠겼다가 빨랫방망이를 찾아 들었다.



머리를 박살낼 수는 없으니... 그 바가지를 박살을 내리라,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부인은 중문 안 쪽에 숨어서 빨랫방망이를 숨겨들고 때를 기다렸다.

얼마 기다리자 남편이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종종걸음으로 중문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와다닥! 힘껏 후려치는 때에 맞춰 번개가 반짝거렸다.


남편은 그대로 쓰러졌다. 바가지는 산산조각 나고 부인은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남편은 잠시 뒤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다. 머리가 얼얼하고 부어올랐을 뿐, 그렇게 심하게 다친 데는 없었다. 그리고선 방 안으로 들어와 급히 부인을 깨웠다.



왜요?


부인, 부인... 어서 일어나 보시오.


왜?


부인. 벼락에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지 않은가? 큰 것에 맞으면 그냥 죽는 것이지만...


작은 걸 맞으면 액땜을 했다고 그러나요?


아니, 벼락에 맞고 죽지 않으면 부자가 된다고 합디다. 내가 변소에 갔다 오는 길에 벼락을 맞았소. 우리는 부자가 되게 됐소. 허허허.


허허허...



부인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남편도 같이 허허, 하고 웃어버렸다. 그렇게 둘은 서로 마주보며 한참을 웃었다고 한다.


주먹을 불끈 쥐며... '하하하'


끝.


어떤가요?


옛날에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끝낼 수 있었다니ㅎㅎ 참 재밌는 일화네요.



「희극의 파편」은 독자가 가볍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저 장면을 꺼내어 놓기만 합니다.



적용 질문입니다.



1. 자고 있는 척을 해본 적이 있나요? 그러면서 누군가의 말을 엿들은 적이 있나요?


2. 만약 남의 말을 몰래 들었지만, 말한 사람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안다면, 그것도 일종의 대화일까요?


3. 진실은 깨어있을 때만 발생하나요? 조는 사이 흐릿하고 희미한 무언가를 더 중요하게 느껴본 적이 있나요?


4. 나의 결핍과 공백은 어떤 식으로 극복하나요?


5. 나는 진지한가요? 혹은 그런 모습이 남사스럽다고 생각해 오히려 경멸하나요?


「희극의 파편」은 ‘이상하게 오래 남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내고, 붙잡고, 말로 돌려줍니다.



부조리한 생각이 관용구에 꼭 들어맞을 때 희극적 의미가 생겨난다.


-베르그송



오늘의 음악입니다.


세 명의 오솔레미오

(출처: corellon01 채널)





부를 때만큼은 진지하지만...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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